역사학자의 적나라한 눈
안네의 일기보다 훌륭하다. 역사학자이며 서울대 교수인 김성칠 선생이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까지 남긴 일기는 역사적 사건을 충실하게 기록한다.
일기는 특정 시대 어느 개인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의 단면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후대의 해석과 왜곡을 배제한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다.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지식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남긴 기록은 대한민국 그 어느 일기보다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해방 직후 한반도
김성칠 선생의 일기는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시작한다. 그는 동료 지식인들이 좌익 쪽으로 기울어감을 지적했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 사회주의는 일종의 유행병이었다니.
(1945년 12월 5일)
혜화정으로 이철 군을 찾았더니 요사이는 인민공화국에 가서 일 본다고 부재. (...)
병중의 김씨도 좌익과 연락을 갖는 것 같고, 이렇듯 모든 정직한 동무들이 지향하는 그 길은 과연 오늘날 조선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일까.
중도 지식인 김성칠 선생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공산주의가 이념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음은 인정하면서 개인과 국가를 우상화하는 문제를 정확히 지적한다.
그의 합리적인 태도 때문에 이 일기가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반공정권은 이런 합리적인 발언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1946년 2월 6일)
(...) 어제 박군 댁에서도 강신묵씨에게 공산주의의 이념은 좋으나 조선공산당의 잘못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며, 소련과 스딸린을 우상화하지 마라고 하고 공산당의 사대주의를 시급히 청산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인민군의 서울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로 밀려왔으나 김성칠 선생은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그는 같은 민족인 인민군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순수 학자로 살아온 인생에 비추어 도망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로 진주하는 모습을 친근하게 묘사한다. 대다수의 시민도 북조선과 인민군에 적대감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좌우 이념은 민초들에게 먼 얘기였고, 신탁통치 때문에 미국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건립된 지 5년도 채되지 않았으니 국가에 대한 충성도 낮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 탱크며 자동차며 마차며 또 보병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은 비록 억센 서북사투리를 쓰긴 하나 우리와 언어, 풍속, 혈통을 같이하는 동족이고 보매 어쩐지 적병이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디 멀리 집 나갔던 형제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오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전근대적인 시대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인민 재판으로 사람을 파리처럼 죽이는데, 왜 죽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다. 반동분자로 지목 받으면 그냥 죽어야 했다.
난리통에 억울한 사람이 정말 많이 죽었을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은 타인의 재산과 재물을 빼앗기 위해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
(1950년 7월 5일)
(...) "이 사람이 반동분자요 아니요?" 하고 물으매, 모두들 기가 질려서 아무말이 없는데 그중에 한두 사람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들을 적발한 사람인 듯- "악질 반동문자요"하고 소리치니 두말없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 죽이는데, 그 피를 뿜으면서 버둥거리다 숨지는 양이 보이게 하도 징그러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버리었다 한다. 그 죽은 청년들이 어떤 반동행위를 했는지 군중은 알지 못한 채.
김성칠 선생도 혹여 반동분자로 몰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급적이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 시대에 가장 양심적이고 떳떳했던 사람도 두려움에 떨어야하는 사회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아갈지 의심스럽다.
(1950년 8월 16일)
(...) 어떠한 한계의 사람이 반동으로 몰리는 것인지, 또 몰리면 어떠한 경로를 밟아서 어떠한 처단을 받는 것인지? 이런 것이 모두 분명치 아니하고 정치의 필요에 따라, 또 더러는 그 많은 끄나풀들의 감정 여하에 따라 아무라도 언제든지 반동으로 몰릴 수 있는 것이며, 또 한번 몰리고 보면 그때그때의 객관적 정세의 변동 여하에 따라, 또 더욱 불안스런 것은 국에 당한 사람의 판단이랄까, 좀더 나쁘게 말하면 기분 여하에 따라 어떻게든 처단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념과 의도가 좋아도 현실 구현은 사회 투명성과 시민의 의식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인민군의 식량배급을 중간에서 빈번하게 착복한 것 같다. 당시 조선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어떤 제도를 도입해도 부정, 부패의 벽에 가로막혀 실패했으리라.
(1950년 9월 6일)
의용군으로 나가면 남은 가족에겐 식량의 특별배급이 있고 또 그뿐만 아니라 인민위원회에서 생활의 모든 면을 걱정해준다던 이야기는 나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그 의용군이 일선에 나가서 부상하고 돌아온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식량 한알의 배급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
민주가정으로 이름이 높은 바로 그 앞집 이윤기 씨네는 양식을 가마니로 들여오고 또 그 여러 형제가 한 사람도 의용군에 나가지 않을뿐더러 저녁마다 굽는 냄새에 이웃 사람들의 굶주린 비위가 뒤집힐 지경이라고.
다만,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던 그도 민족주의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인민군이 어서 북으로 돌아가길 내심 바라면서도 조선인이 미국을 격퇴하는 모습에 흥겨워한다.
(...) 인민군의 이렇듯한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일본도 마침내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던 미국의 힘과 겨뤄서 자꾸만 이겨나간다는 사실은 아닌게아니라 조선 사람으로서 어깻바람이 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국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건너갔다.
(1950년 9월 26일)
(...)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 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해꼬지하기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을 대표가 부역자 누명을 쓰고 잡혀갔다. 김성칠 선생은 누군가 그의 자리를 탐내서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했다. 국군이 진주하면서 기회주의자들의 더러운 패악질이 또 다시 만연했다.
당시 한국 사회 수준은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한반도는 어떠한 이념도 제대로 작동 못할 만큼 후진적이었다는 확신만 굳어진다.
(1950년 11월 9일)
우리 마을 구장 성윤길씨가 붙들려 들어갔다. 그가 비록 그리 유식한 편은 아니어도 매우 유능하고 성실한 인물인 줄 나는 잘 알고 있다. (...)
그가 부역자로 체포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다. 가뜩이나 인재가 가난한 우리 마을에서 그처럼 유능한 분을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얽어서 희생시킨다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국군은 이북으로 진격하면서 살인, 강간 등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군도 조선반도의 다른 모든 집단과 마찬가지로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회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어떤 제도도 무용지물이다.
(1950년 11월 14일)
국군이 평양에 들어가서, 또 기타의 이북지역에서 약탈과 강간을 함부로 하여 이북동포들의 커다란 실망을 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주인과 함께 잠들었던 일기
중공군 개입으로 인민군이 다시 내려오면서 김성칠 선생은 서울을 떠나 고향(대구)으로 피난했다. 피난지에서 김성칠 선생은 임시 교실을 열고 학생을 모아 수업한다. 전쟁통에도 학업을 중단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열성과 학생들의 의지에 고개가 숙여진다.
어떤 제도와 이념도 제대로 이식되지 못할 만큼 전근대적이고 혼란스러웠던 사회가 현재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본분에 충실한 민초들의 힘이었다.
(1951년 3월 4일)
(...) 재판소 앞 변씨의 법률사무소 방 한간을 빌려서 학생 스무남은 명이 그 툇마루에까지 넘칠 지경이고 그리고 이 우리들의 교실 한구석엔 네댓살 먹어 보이는 아기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든 가열한 현실 속에서도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며, 또 제군은 아무리 비통한 현실 속에 처하여서도 그 현실의 힘에 짓눌리기만 하지 말고 이성적인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는 젊은 학도로서의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가열한 현실, 비통한 사태를 표현함이 좀 지나쳤는지 학생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하여 나 자신 자꾸만 목이 메었다.
김성칠 선생은 1951년 10월 9일 좌경 세력으로 추정되는 괴한에게 피격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일기는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하다 1993년에야 초판이 인쇄될 수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가치있는 기록을 남겼지만, 반공정권은 그의 합리적인 흔적조차 용납하지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