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문장: 런던과 도쿄, 그리고 서울

개인적으로 '공간'(정확히는 감도가 높고 영감을 주는 공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이 주도하게 된다는, 이른바 '디지털 퍼스트(Digital First)'가 매거진 업계에도 휘몰아쳤을 때도 저는 오히려 그 정반대 편에 있는 오프라인, 그 중에서도 공간에 깊숙이 꽂혔었습니다.

 

물론 지극히 아날로그적 인간형인 개인 취향 탓이기도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강력한 의문점 하나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디지털은 그야말로 물과 공기와도 같이 일상적인 그 무엇이 될 텐데, 앞으로의 콘텐츠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차별화시켜야 할까?'라는 의문점 말이죠.


그때부터 세계 유수의 도시들을 틈날 때마다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내게 영감을 주는 공간은 어디인가, 그리고 내부 인테리어 이전에 콘텐츠를 공간 안에 제대로 풀어놓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였습니다.


그 첫손에 꼽는 도시가 제게는 런던입니다. 특히 런던올림픽을 기점으로 낙후됐던 이스트 런던(East London) 지역이 쇼디치(Shoreditch)와 해크니(Hackney)를 중심으로 공공 디자인 측면에서 멋들어지게 재생되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쾌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전통과 혁신 중에서 '혁신'에 강하게 방점을 찍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를 생동 발랄하게 살아 뛰게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장인보다는 메이커에 더 가까운 젊은 그룹들입니다. 그들이 만들고, 섞이고, 생활하는 무수한 공간들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런던에는 시내 곳곳의 풍경을 시즌마다 살아 뛰게 하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London Design Festival)'*과 '프리즈 아트 페어(Frieze Art Fair)'가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은 꽤 많이 다뤘기에 올해에는 리젠트 파크(Regent's Park)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프리즈 아트 페어'를 좀 더 깊숙이 취재해 보았습니다.  

* 관련 리포트: '영감을 주는 모든 디자인 -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17' (PUBLY, 2018.1)

베르니 시얼(Berni Searle)의 작품 ⓒLinda Nylind, Mark Blower그 다음은 당연히 짐작하시듯 도쿄입니다. 도쿄는 전통과 모던의 결합이라는 아시아 국가의 오랜 딜레마를 꾸준하고 차분하게 고민한 끝에 그만의 답을 찾아내고 있는 대표 도시라 할 만합니다. 특히 책을 중심으로 지극히 정갈한 공간 속에 맞춤한 콘텐츠를 집어넣는 솜씨는 그야말로 감탄사를 자아냅니다.

 

여기에 나카메구로 등 1960년대 건물들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연스럽게 세련된 숍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은 조용한 골목길을 걸어 보면 도쿄라는 도시의 저력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련된 숍마다 문 앞에, 또는 테라스 등지에 적게는 몇 개에서부터 많게는 수십 개에 이르는 정갈한 화분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배치한 모습을 보면, 거대 메트로폴리탄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녹음을 품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도쿄는 매달 도시를 탐험하더라도 항상 의미있는 새로운 공간들이 발견되는, 놀라운 영감의 보고입니다. 이번 달에는 도쿄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지역 중 하나인 '야나카'에 지극히 모던하고 세련된 '도쿄 바이크(Tokyo Bike)'라는 자전거 가게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는 지를 취재해 보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도쿄의 공간과 그 안에 깃든 콘텐츠에 대해서는 거의 매달 다루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도쿄바이크 렌털스 야나카(Tokyobike Rentals Yanaka) 전경 ⓒ유소라사실 이런 도시들에 비하면 아직까지 '서울적인 공간'이라는 컨셉은 조금 애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특히 올해 들어서는 서울만의 특성과 장점을 보여주는 공간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남산과 남대문 시장 사이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입니다. 그동안의 서울은 종로와 퇴맛길 등의 사례로 보면 과거를 부수거나 지우고 새로운 높은 빌딩을 짓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그나마 몇 년 전부터 옛 건물이나 거리를 보전한 상태에서 리뉴얼하자는 움직임이 형성되었고, 최근의 을지로 열풍 등은 이런 흐름이 대세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올해 등장한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은 그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지어진 제약회사 건물의 외형과 내부를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꼬불꼬불한 남대문 시장 골목에서 시작되는 호기심 가득한 흐름을 탁 트인 남산 전망의 루프탑까지 이상적으로 연결한 전시장이라니요.


비슷하게는 올해 9월에 오픈한 '호텔 더블에이(HOTEL DOUBLE A)'도 꼽을 수 있겠습니다. 1959년에 세워진 아스토리아 호텔은 60년 넘도록 영업을 지속해 왔다가 지난 2015년 잠시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3년간의 리뉴얼 과정을 거쳐 드디어 올해 전통과 미래를 결합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낙산공원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화루애' 또한 주목할만한 장소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서울 성곽을 배경으로, 20세기 중반의 근현대사의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 있는 장소에, 1950년대의 적산가옥 양식의 건물을 세련되게 리뉴얼한 인상적인 장소입니다. 최근 이화동을 방문하고 있는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의 관계도 안정되면서 서울을 상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 되는 것도 주요 포인트입니다.

ⓒCiaran O'Brien/Unsplash이처럼 서울 특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개척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이처럼 '스토리와 역사성을 분명히 가진 장소들을 어떻게 세련되게, 의미있게, 제대로 된 콘텐츠를 담을 수 있도록 리뉴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취재를 통해 '서울적인 공간'에 대한 고민은 계속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큐레이터, 박지호 아레나 편집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