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의 시작

아침마다 슥 훑어보는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 기사에 스위스가 등장하는 경우는 주로 비싼 시계나 은행을 다룰 때이다. 스위스에 세계적인 투자 은행인 크레딧 스위스(Credit Suisse)나 UBS 가 있기도 하고, 스위스 프랑이 안전 통화로 취급되다 보니 바깥 정세가 뒤숭숭해지면 관련 기사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스위스 은행'이 '스위스 시계'만큼이나 유명한 이유는 거부들의 떳떳지 않은 재산 뿐만 아니라, 다른 비밀까지도 보관해 주는 걸로 알려져서 영화

스위스 비밀 은행의 시작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 14세는 절대 왕정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개신교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했던 '낭트 칙령'을 '퐁텐블로 칙령*'으로 폐지한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던 프랑스 신교도들은 가톨릭 교회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이주했고, 그중 일부가 스위스로 옮겨가 은행업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스위스 은행의 주요 고객은 국경 확장을 위해 큰 돈이 필요했던 루이 14세. 자신이 추방한 신교도들에게 돈을 빌린다는 사실이 머쓱했던 국왕은 이 사실을 감추려 했고, 이때부터 고객의 거래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는 '은행 비밀주의(banking secrecy)'가 싹텄다고 한다.

 

이후 잦은 전쟁과 혁명으로 불안해진 유럽의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중립국인 스위스로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스위스는 점차 비밀 은행 강국으로서 기반을 다지게 된다.

 

비밀 보장을 법으로 제정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즈음이었다. 유태인들이 나치를 피해 스위스 은행에 재산을 예치하기 시작하자 1934년, 스위스 정부는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겠다는 좋은 뜻으로 은행 비밀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그냥 명목뿐이었는지 후에는 유태인이 스스로 예치한 재산뿐 아니라, 나치가 모아온 유태인의 반지부터 금니까지 알아서 처리를 해주면서 히틀러의 자금 줄 역할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세계 각국의 독재자와 마약상들의 검은 돈 세탁, 일부 부자들의 해외 세금 포탈을 위한 목적으로 스위스 은행으로 돈이 모인다. 하지만 자국민이 해외로 빼돌린 세금을 걷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 정부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나서서 스위스 정부를 압박한 결과, 요즘은 협약이 된 외국 정부가 요청한다면 계좌 정보를 공개하게 되어 있다. (관련 기사)

 


* 퐁텐블로 칙령: 개신교를 탄압, 억압하기 위해 예수회가 기존의 낭트 칙령을 무효화 시키고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를 압박해 반포함 (출처: 위키백과)

스위스 은행에서 계좌 만들기

스위스에 도착한 다음날, 각종 정착 업무를 도와주던 에이전트는 오후 1시에 계좌 개설을 하기로 은행과 약속했다며 나와 (내 이주를 빌미로 관광을 오신) 부모님을 취리히의 금융가 파라데플라츠(Paradeplatz)에 있는 크레딧 스위스에 내려주고 갔다.

크레딧 스위스 파라데플라츠 지점 ⓒ크레딧 스위스

은행 건물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한 시내에서 순간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무섭도록 차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여기가 갤러리인가 은행인가' 싶은 순간에 나타난 직원이 2층으로 에스코트했다.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다. 중후함이 느껴지는 중년 여성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고풍스런 미팅 룸으로 안내했다. 내가 은행 일을 보는 동안 부모님은 은행 정수기 물을 한잔 마시고 시내 관광을 하러 나가실 참이었는데 얼떨결에 은쟁반에 병째로 나온 스파클링 워터와 크리스털 잔을 접대받고,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직원 두 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쳤다. 사실 시내 구경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 재밌겠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이게 그 유명한 스위스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인가?

왠지 검은 돈 세탁의 심장부에 들어온 것 같아 순간 흥미가 발동. 그러다 내가 그저 월급 통장을 만들러 왔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나자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졌다. '은행에서 뭔가 착각했나. 아님 월급 통장 하나에 뭐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나' 했는데 대강 상황을 보니 한 명은 상사, 한 명은 신입이었다. 아마 나같이 만만한(?) 사람을 상대로 신입 직원을 트레이닝을 시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들의 목적이야 어쨌든 신입으로 보이던 청년이 생글거리며 내보이는 서류에는 나의 모든 정보가 이미 인쇄되어 있었다. 아직 입에 익지 않은듯한 계좌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서명해야 할 몇 군데에 끄적거리는 걸로 계좌와 신용카드 만들기는 우아하고, 싱겁게 끝이 났다.

 

두 직원이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오길래 스위스에서는 원래 다 이렇게 하냐고 물어보니 "스위스 프라이빗 뱅킹의 명성에 맞춰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고 싱긋 웃으며 회사 브로슈어에 나올 법한 대답을 했다. 어둑한 실내에서 회전문을 열고 다시 햇빛이 쨍한 밖으로 나오니 잠깐 스위스 판타지 동산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대신에 '부자 되세요' 가 어울리는 그런 놀이동산.

 

참고로 여러 사람의 경험을 종합해보니 모든 크레딧 스위스가 이렇게 하는 건 아니고, 파라데플라츠 지점이 특별히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 후 이야기

몇 주 뒤, 나는 크레딧 스위스의 계좌를 폐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장의 연수수료가 10여만 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0에 가까운 이자율에 연회비라니. 은행에 맡겨도 돈이 줄어드는 기막힌 사태다. 영국에 있는 은행도 외국 학생이 무료 계좌를 여는 제한조건에 걸리거나, 핸드폰 보험을 함께 제공 + 약간 높은 이자율까지 더한 선택 조건이 있을 때에는 수수료를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주는 거 없이 막 떼가지는 않았다.

 

게다가 요청할 일이 있으면 이메일로 연락을 달라길래 보냈더니 이틀 뒤에나 답변을 주었다. 절세 통장, 투자 상품에 대한 문의에도 제대로 답해 주지도 않고 오히려 더 비싼 계좌로 업그레이드를 권장하는 어설픈 세일즈만 가득했다.

 

그러다 지난번에 동료가 UBS에서 회사와 연계된 계좌를 연회비 무료로 개설했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다시 물어보니 진짜였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의 느낌으로 절세 통장도, 신용 카드도, 투자 상품도 내가 찾던 상품들을 모두 알아서 묶어놨다. 그래, 이게 서비스지.
 

회사 점심시간에 잠깐 들린 동네 UBS의 서비스는 깔끔했다. 대단한 환영도 없었지만, 더할 것도 없는 서비스였다. 1층 리셉션에 계좌 개설을 하러 왔다고 이야기하니 매니저가 바로 내려왔다. 지난번에 크레딧 스위스에서 요구했던 서류를 모두 챙겨 간 터라 30분 만에 월급 통장, 저축 통장, 절세 통장, 신용 카드 세트 발급이 서류상으로 끝났다. 투자 상품은 개인이 선호하는 리스크 레벨에 따라 채권, 주식, 부동산에 걸친 다양한 UBS 투자은행의 상품들을 알아서 잘 묶어두었다.

이런 게 바로 내가 기대한 은행 강국의 서비스랄까.

대 자산가들을 위한 서비스야 워낙 많을 테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초 저금리 저축통장을 대체할 수 있는 기본적 투자만 서비스해주면 될 텐데 사람들이 돈을 불리는 방식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영국은 인베스트먼트 뱅킹(Investment Banking)이 그리 강해도 리테일 뱅킹(Retail Banking,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은행)과는 따로 노는 데다가, 일반 개인 고객들은 재테크의 개념이 아예 없거나 부동산에 올인한다. 반면에 한국은 개인이 알아서 부동산, 주식, 펀드에 올인을 하거나 분산 투자하는 시장이다. UBS를 통해서 본 스위스 은행은 리테일 뱅킹과 인베스트먼트 뱅킹이 연계가 되어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전혀 신기할 것 없는 일인데도 한발 더 나간 느낌. 

 

UBS 계좌를 만들고 사무실로 돌아와, 크레딧 스위스의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새로 만든 UBS 계좌로 전액 송금과 크레딧 스위스의 계좌 폐쇄를 요청하면서 혹시나 크레딧 스위스에서 UBS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 어떡하지 잠깐 고민했는데 그런 제안은 전혀 없었다.

 

그는 격식 차린 미사여구로 '아쉽다, 요청 사항은 처리 중이다'라는 회신을 보내면서도 그동안의 수수료가 있는지, 있다면 얼마인지에 대한 내 질문에는 또 답이 없다. 친절하면서도 정작 내가 물어보는 내용에는 묵묵부답. 크레딧 스위스가 CEO도 바뀌고 프라이빗 뱅킹 쪽을 강화할 거라더니 나 같은 저부가가치형 고객은 미련 없이 정리하나 보다. 인건비 비싼 이 나라에서 스위스식 환영 서비스를 맛본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UBS를 통해서 겪은 일반적인 스위스 은행에서는 기술이 인간을 대체한다.

내가 크레딧 스위스에서 계좌를 만드는 과정이 유별났을 뿐이지 크레딧 스위스도 일반적인 운영 방식은 비슷하다. 은행에 줄 서는 사람도 없고, 직원들이 고객을 상대하고 있는 일도 거의 없다. 점심 시간에는 창구를 닫고 그들도 점심을 먹으러 간다. 해외 송금이나 환전처럼 사람을 통해서 해야 할 법한 하러 가면, 멀티마트(Multimat)라는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처리할 수 있는 자동화 기계로 안내하고 총총 사라진다. 

 

"스위스는 '사람을 통한 최상의 서비스'와 '기계를 통한 최상의 서비스' 양 끝이 공존하는 재밌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기계가 발전하면서 사람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높아지면 언젠가는 사람보다 기계를 이용하는 편이 나을 순간이 온다. 스위스는 이미 그 순간을 넘어, 나름의 밸런스를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