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신이 오셨다고 해도

브리프를 접하자마자 최종 결과물이 머리에 딱 떠오를 때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후다닥 스케치해서 약간의 컴퓨터 렌더링을 가하는 것뿐이다. 정말 그럴까? 그러면 일이 끝나는 걸까? 이런 식의 본능적, 직관적 접근법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렇게 나온 결과물은 자동반사적 반응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평소 마음에 묻어두었던 한정된 수의 심상 중 하나가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둘째, 현실 세계의 심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고객사(또는 상사)에게 자신의 아이디어가 브리프를 충족하고 일정과 예산에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때문에 디자인 업계는 직관에 의존하는 대신 디자인 프로세스라는 일종의 표준화 공정을 개발했다. 이 프로세스는 디자이너가 합리적 일정 내에 최대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결과를 내도록 지원하는 틀과 밑천이 된다. 이번 챕터에서는 이 디자인 프로세스의 체계와 편익을 전체적으로 살핀다. 

디자인에 왜 프로세스가 필요한가?

다각화한 요구에 일관된 품질로 대응하기 위해 대행사들은 디자인 프로세스를 결과지향적으로 정비해서 마치 과학적 방법론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프로세스를 자사 홍보물과 웹사이트에 광고한다. 잠재 고객사들을 향해서, 우리는 성공을 추진하는 검증된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노라 외치는 것이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종이 위에 단정하게 직선으로 진행하는 단계들로 표현된다. 이 단계들은 어느 대행사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건 방법론적으로 봤을 때 이야기고, 실제 크리에이티브 접근법을 들여다보면 작업방식은 대행사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일부 대형 대행사는 모든 고객사에 하나의 정해진 접근법을 적용한다. 

 

이런 시스템은 시행착오를 거쳐 고안되고, 브랜드 디자인 품질과 회사 수익을 동시에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반면 다른 대행사들은 한층 유연한 접근법을 적용해 프로젝트마다 절차를 달리 가져간다. 존슨 뱅크스가 그런 경우다. 존슨 뱅크스보험회사 모어댄MORE TH>N의 브랜드 창조에 처음부터 참여해서 금융 브랜드라고 해서 꼭 딱딱하고 보수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선단체 셸터Shelter의 리브랜딩 때는 고객사를 단박에 해당 분야 선두주자로 등극시키며 자선단체에게도 브랜딩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작용

ⓒPUBLY

디자인 프로세스는 디자인 업계에서 자연 발생해 다년간 복합적 상세 방법론으로 진화했다. 위의 4단계 버전은 디자인 프로세스를 극도로 일반화한 개요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브랜딩 대행사들이 BI를 창조할 때 공통적으로 밟는 단계들을 간추린 것이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크리에이티브 작업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한다. 디자인 대행사가 고객사에게 돈이 어떻게 쓰일지 미리 보여주고, 크리에이티브 작업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을 깨주는 기능도 한다. BI를 창조할 때 크리에이티브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디자인 프로세스의 주요 단계들을 빠짐없이 밟는 것이다. BI가 목표에 맞는지 점검하고, 중간 결과물을 정제해 나가고, 최종 디자인이 오리지널 브리프에 부합하는지 확인한다. 이 프로세스는 없던 브랜드를 창조할 때도, 있는 브랜드를 개조할 때도 동일하다. 

 

체계는 창의를 막지 않는다. 오히려 창의를 돕는다. 발상을 전개하고 구현할 시간과 공간을 적절히 배정하게 한다. 또한 아이디어가 바닥났을 때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운다. 

이 인포그래픽은 브랜딩 대행사 지스트 브랜즈의 창립자 제이슨 할스테드가 고객사에게 자사 브랜딩 프로세스를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리서치부터 최종 디자인 결과물까지 이르는 각 단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Gist Brands결과적으로 디자인 프로세스는 다음을 지원한다. 

  • 방향성 있는 디자인 결정들. 최종 컨셉에 이르게 된 길을 보여주고 정당화한다. 
  • 리서치의 깊이와 폭. 시장 현황과 업계 동향에 대한 지식을 최종 결과물을 위한 통찰로 바꾼다. 
  • 프로젝트 운영 능력. 오리지널 브리프를 고수하고 예산을 지키게 한다. 
  • 시간 관리. 단계별 시간 안배를 통해 늘어지거나 쫓기는 프로젝트를 방지해서 크리에이티브 결과물의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단계들

일단 고객사가 디자인 대행사에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브리프를 전달하면,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모여 신생 브랜드 창조를 위한 디자인 프로세스를 짠다. 이 프로세스를 구성하는 주요 단계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홍디자인

1단계: 분석

분석은 상세 검토와 평가를 말한다. 이 단계는 설문 조사와 근거 수집을 수반한다. 이 단계에 앞서 광범위한 소비자 조사를 수행한다. 소비자 조사의 목적과 방법은 챕터 5. 리서치에서 다루고, 제품 분석과 시장 분석은 챕터 6. 분석에서 다룬다. 제품의 시각적 속성 분석과 업계의 마케팅 성공사례 검토도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분석 대상은 다음을 포함한다. 

  • 브랜드의 나이와 역사 
  • 현재의 시장 포지션
  • 타깃 시장/소비자/오디언스 
  • 현 브랜드 속성 
  • 프로젝트의 전반적 목표, 기간과 기한, 예산 

2단계: 토의

분석 결과와 고객사 니즈를 정리하기 위한 토의가 필요하다. 이 자리에서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방향을 정하고 공유한다. 브리프에 문제를 제기하고 보완하는 기회도 된다. 

 

3단계: 디자인 플랫폼 마련

브리프를 보다 완성된 형태로 재구성하는 단계다.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분석 결과와 고객사의 요구사항을 요약한다. 이 단계는 분석 결과와 디자인 전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4단계: 디자인팀에 브리프 전달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지금까지의 발견사항을 실무 디자인팀에 전달한다. 전달 내용은 다음을 포함한다. 

  • 디자인 플랫폼
  • 경쟁자 정보와 경쟁 환경 분석 결과 
  • 선행 디자인의 성공과 실패 원인 분석 결과 

5단계: 브레인스토밍

집단 토론 방식으로 자유로운 아이디어 발의와 개진에 들어간다. 이 자리에서 디자이너들은 BI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다. 전체적 인식만 아니라 세부적 의견 차이도 조율한다. 디자인팀이 공유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브랜드 자산, 브랜드의 역사와 헤리티지 
  • 브랜드 개성 구축에 쓸 도상학 요소들―심벌, 컬러 등―에 대한 의미론적 이해
  • 프로젝트 용어 공유, 즉 브랜드의 개성과 감성적 속성에 대한 표현 통일 

6단계: 독자적 리서치 수행

이번 리서치는 디자인팀이 또는 디자이너 각자가 직접 수행한다. 아직 여물지 않은 초벌 아이디어들에 정보와 영감을 더할 자료와 근거를 광범위하게 찾는다. 

 

7단계: 컨셉 개발

고객사가 제작을 요청한 모든 브랜드 요소―브랜드명, 슬로건, 로고 등―를 다양하게 구상하는 단계다. 디자인팀이 함께 하거나 디자이너 각자 수행한다. 이 단계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의 수는 할당한 시간과 예산에 영향을 받는데 때로 수백 개에 이른다. 

섬네일 스케치 ⓒ홍디자인

이 시점의 아이디어는 아직 초안에 불과하다. '섬네일'이란 흔히 이미지를 화면에 늘어놓기 좋게 엄지손톱 크기로 줄인 것을 말하지만, 이때의 섬네일은 재빨리 작게 그린 여과되지 않은 스케치를 말한다. 주로 종이에 펜으로 그린다. 섬네일 스케치의 목적은 특정 아이디어에 우선순위나 애착을 두지 않고 가급적 많은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데 있다. 컨셉 발의와 개발의 첫 걸음은 '자유 스케치'다. 

 

자유 스케치는 생각의 단초이자 기록이 되고, 아이디어를 합리화하고 전개시키는 수단이 된다. 이 초벌 스케치는 비율을 칼같이 지킬 필요도, 원근이 완벽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다듬어지지 않은 스케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자유 스케치만 하는 건 아니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후반으로 가면 드로잉에 높은 수준의 정밀성이 요구된다. 그래야 컨셉의 잠재성을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종이에 재빨리 옮기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특히 회의 때는 컴퓨터를 켜는 것보다 바로바로 그려서 제시하는 것이 의견 개진과 일의 진행에 유리하다. 

대략적인 컨셉 ⓒ홍디자인

이제 디자인팀은 나온 스케치를 모두 검토한다. 크리에이티브 브리프와 디자인 플랫폼을 잣대로 삼아 평가한 후, 잠재력을 보이는 것들을 추려서 펜과 종이로 또는 컴퓨터에서 더 꼼꼼히 검토한다. 

 

8단계: 디자인 컨셉 분석

ⓒ홍디자인이제 디자인팀은 '대략적인 컨셉' 아이디어들을 검토한다. 지금까지 수행한 리서치와 분석을 감안하고, 고객사의 오리지널 지침서를 참고해서 아이디어들을 평가한다. 이렇게 걸러진 컨셉들을 몇 가지 핵심 옵션들로 줄여서 고객사에게 제시한다. 이런 순차적 접근법은 결과물 후보들을 여러 방면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시각을 보탤 기회를 제공한다. 

 

9단계: 최종 컨셉 정제

ⓒ홍디자인디자인팀이 선택한 컨셉들이 소기의 브랜드 메시지를 분명히 담아내는지, 결과적으로 고객사 지침을 충족하는지 확인한다. 최종 선발된 아이디어를 여러 컨셉으로 분화한다. 이를테면 아이디어에 크리에이티브 척도를 적용해서 여러 버전으로 만든다. 

 

대표적인 크리에이티브 척도로는 '순하거나 사납거나Mild To Wild'와 '진화냐 혁명이냐Evolution To Revolution'가 있다. 디자인을 일정 비율로 키우고 줄였을 때, 좌우상하로 반전시켰을 때, 흑백일 때와 컬러일 때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본다. 하지만 이때의 컨셉들은 아직도 날것의 상태다. 완성 도판Artwork 제작에 들어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앞으로 타이포그래피와 컬러 사용도 정제해 나가야 한다. 

 

이쯤에서 고객사 발표를 준비한다. 최종 디자인을 가늠할 수 있도록 반쯤 완성된 상태의 도판을 만들고, 고객사에게 최종 디자인 해법을 납득시키기 위한 발표 자료를 준비한다. 

 

10단계: 고객사 프레젠테이션

디자인 대행사의 업무 체계, 규모, 조직에 따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나 시니어 디자이너, 어카운트 핸들러가 이 단계를 주도한다. 프레젠테이션은 수백 시간에 걸친 작업의 정점을 찍는 일인 동시에, 고객사의 돈이 헛되이 쓰이지 않았음을 입증할 기회이기도 하다. 발표 자리에서 오직 하나의 컨셉이 낙점을 받기 때문에 이 단계의 결과물이 프로젝트 최종 결과물의 전신이 된다. 

 

11단계: 마무리/최종 디자인의 시제품 제작

ⓒ홍디자인고객사가 선택한 컨셉을 마지막으로 손질하는 단계다. 앞 단계에서 고객사와 합의한 변경 사항이 있다면 최종 BI에 반영한다. BI의 구성요소 모두와 그 밖의 부수적 디자인 결과물들을 완성 도판 형태로 제작한다. 

 

12단계: 테스트/시장 조사/소비자 반응 조사

최종 디자인이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지, 즉 타깃 오디언스에게 효과적으로 '말을 걸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다. 확인 결과에 따라 최종 디자인을 소소하게 손봐야 할 수도 있다. 

최종 BI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가 포커스 그룹 인터뷰다. 이 단계의 BI는 매우 민감한 기밀 사항이고, 기밀유지계약에 따라 보호된다. 디자이너를 비롯해 프로젝트 관계자들은 일정 수준의 비밀 엄수 의무를 진다. 

 

13단계: 최종 아트워크 전달

고객사의 오리지널 브리프에 따라 개발된 모든 크리에이티브 결과물은 이제 디자인팀의 손을 떠나 고객에게 인도된다. 

 

후속 과제

브랜드 출시의 책임은 통상적으로 고객사에게 있다. 기업은 마케팅 대행사나 광고 대행사와 함께 출시를 진행한다. 그러나 디자인 대행사에게 마케팅 프린트물 제작을 의뢰할 때도 있다. 또는 패키지 디자인의 연장선에서 디자인 대행사가 판매 시점 진열Point Of Sale Display 같은 출시 커뮤니케이션 요소들의 개발까지 맡기도 한다. 

 

브랜딩은 단거리 역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브랜드 가치를 시장에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비자 기반을 육성하는 데 보통 몇 년씩 걸린다. 대기업의 경우 브랜드마다 브랜드 매니저를 둔다. 브랜드의 지속적 성장은 해당 브랜드 매니저의 몫이다. 브랜드 매니저가 BI의 커뮤니케이션과 마케팅을 진두지휘한다. 그 과정에서 브랜드의 새단장이나 확장이 필요할 때 디자이너가 투입된다. 

크리에이티브 프로세스

지금까지 BI 창조 작업의 실무적 단계들을 훑어보았다. 이 프로세스는 가시적이고, 측정 가능하고, 명백하다. 하지만 최종 결과물의 품질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또 다른 프로세스가 있다. 드러나지 않고 마치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이 과정을 우리는 흔히 크리에이티브 프로세스라고 부른다. 이 프로세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프로세스다. 디자이너의 개성을 반영하고, 고도로 논리적이면서 감성적인 동시에 본능적으로 일어난다. 

 

최초로 크리에이티브 프로세스를 구조화한 사람 중 한 명이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그레이엄 월러스다. 월러스는 <사고의 기술>에서 창의적 사고 과정을 다음의 네 단계 모형으로 제시했다.

  • 1단계: 준비
    주어진 문제에 마음을 모으는 단계. 문제의 범위와 차원들을 검토하고 납득한다. 
  • 2단계: 배양
    문제를 무심결에 내면화하는 단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해법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무의식 속에서 배양하고 있다. 
  • 3단계: 자각
    보통 '유레카 모멘트' 또는 '아하! 하는 순간'으로 표현되는 단계. 창의적 아이디어가 전의식 처리 영역에서 갑자기 의식적 인지 영역으로 튀어나온다. 
  • 4단계: 검증
    아이디어의 실행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점검하는 단계. 아이디어를 정교하게 풀어내고 현실에 적용해 본다. 

월러스 이후 수십 년이 흐른 1988년, 미국 심리학자 엘리스 폴 토런스Ellis Paul Torrance가 '테스팅으로 드러나는 창의성'이라는 논문에서 월러스의 모형이 여전히 창의적 사고 교육 프로그램의 근저를 이룬다고 밝혔다. 특히 갑작스런 '자각'을 낳는 '배양'을 모형에 포함한 것이 주효했다. 많은 이가 창의적 사고를 방향성 없고 불가사의한 잠재의식적 정신 작용쯤으로 여긴다. 월러스의 모형은 창의 과정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디자인 프로세스는 매우 직선적이다. 분명하게 분리된 단계들이 징검돌처럼 나란히 배열된다. 이에 비해 크리에이티브 프로세스는 다분히 개인적으로 진행되고, 디자이너마다 다르게 경험하는 프로세스다. 따라서 정의하기가 어렵다. 크리에이티브 프로세스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네 단계 순환 모형이다. 이 모형은 프로젝트 내내 이어지는 내적 질의응답을 통해 생각이 불확실에서 확실로 진화하는 과정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