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의 나라, 스위스

가을이 유난히 쾌적한 한국을 떠나서 스위스에 도착했는데, 당시 스위스 사람들은 가을 같은 건 얼른 지나가길 바라면서 '겨울 올 때까지만 버티자' 모드였다. 그동안 내가 겪은 유럽의 겨울은 가을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3-4월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을씨년스러움의 정점이었는데 이렇게 겨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처음 봤다.

스위스 사람들이 이렇게 겨울을 고대하는 이유는 스키 때문이다. 

12월이 되어 스키장이 개장하자 회사의 몇몇 스위스 사람들은 단순히 '눈이 온다 아니다' 수준이 아니라 '이번 주말은 눈이 몇 m 이상 온다' 류의 상세한 날씨 예보를 말하며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스위스 스키장과 비용

어떤 스키장이 좋은지 물었는데 사람마다 추천하는 스키장이 전부 달라서 도대체 스키장이 몇 개나 되나 의문을 품었다. 구글 검색창에 '취리히 근처 스키 리조트'를 검색하면 3시간 거리에 있는 스키장이 277개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이 비현실적인 숫자는 스위스와 이웃한 나라의 리조트까지 포함해서 그런 걸 테고, 위키피디아를 찾아 보니 스위스 안의 스키장 수는 42개이고, 취리히에서 당일치기로 갈만한 곳은 10곳 내외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스위스 스키장은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성이 좋다. 보통 기차 도착 시간에 맞춰서 산중에 있는 스키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들이 기차역 근처에 대기를 한다. 스키장 근방으로 가는 기차에는 스키 장비를 놓는 칸이 따로 있고, 버스 뒤에는 스키 트렁크가 따로 달린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타는 기차 플랫폼 옆에서 스키장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데 평일 아침에도 장비를 든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기차에서 스키 장비를 놓는 칸 ⓒ하이디 K.

버스 뒤에 달린 스키 트렁크 ⓒ하이디 K.

스키가 이렇게 대중적인 스포츠라면 비용도 저렴하지 않을까? 천만에. 여기는 스위스. 스키 리프트권은 스키장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웬만한 규모의 스키장은 7-10만 원 선으로 이 정도면 스위스 사람들도 비싸다고 생각하는 가격이다.

 

장비 렌트비는 하루 10만 원에 달하는 대신 한 시즌을 통째로 빌리는 게 대략 30만 원이다. 나는 이 묘한 가격 정책에 말려들어 이번 시즌에는 제대로 스노보드를 타 보기로 하고 엉겁결에 시즌째로 빌렸다. 장비를 빌리면서 '스키 타러 간 첫날 다리가 부러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 일주일치만 제하고 환불해 준단다.
 

스키장 락스(Laax) 체험기

내가 처음 간 스키장은 락스(Laax)이다. 플림스(Flims), 락스(Laax), 파레라(Falera)라는 세 스키 마을이 함께 붙어있어 큰 스키 리조트 지역이다. 여름은 여름대로 그림처럼 파란 초원의 스위스 휴양지였다가 겨울에는 눈에 덮여 스키 리조트로 변한다고 보면 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유스(Youth, 마이클 케인 주연)를 이 지역에서 찍었다.)
 

스키장이 어찌나 큰지 슬로프도 너무 많아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안 올 정도.

락스 슬로프 맵 ⓒ하이디 K.

한국 스키장의 중급을 마스터했다고 믿고 있던 나는 슬로프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본 후 초급으로 시작하기로 계획을 짰다. 하지만 중간에 중급 슬로프로 방향을 틀었다가 오랜만에 공포를 느끼며 겨우 내려와서 반나절 만에 의지를 잃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애든 어른이든 초급 수준의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중 다행이라면 모두 나보다 잘 타는 덕에 다들 알아서 나를 피해 가는 듯하다. 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내가 무사고로 스노보드를 즐길 수 있을 수준에 다다를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등의 복잡한 생각을 하다 장비를 던졌다. 결국 마지막에 락스 스키장 뷰를 보면서 커피 한잔할 때가 제일 행복한 날이었다.


하지만 시즌 통째로 빌린 스노보드는 어떻게든 타야 한다는 본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키 강습을 받았다. 좀 더 만만한, 작은 스키장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구르며, 커리큘럼 대로 가르치는 스위스 강사와 느낌을 강조하는 아르헨티나 강사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스노보드를 좀 더 잘 타게 되었다. 한 달 만에 다시 간 락스 스키장은 그럭저럭해볼 만하다고 할 수준이 되었다.

락스 스키장 뷰 ⓒ하이디 K.

스노보더를 위한 스위스 스키장 팁

스노보드 타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해보자면, 스키 타는 사람이 훨씬 많은 스위스의 스키장의 슬로프들은 좁고 평평하며, 초급 코스라도 중급경사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넓은 슬로프에서 유유자적하게 턴으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수준의 스노보드를 배운 나는 전혀 턴을 할 폭이 안 나오는 좁고 급 경사진 슬로프에 '멘붕'이 왔다. 이런 내게 스위스 강사는 스키처럼 직 활강을 하다가 너무 빨라지면 90도 상체 급회전으로 정지하는 유용하지만 상당히 피곤한 스킬을 가르쳐 주었다.


스위스 스키장 팁, 하나 더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평평한 슬로프에서는 몸을 최대한 바닥까지 낮추고, 무게중심을 뒤로 옮기면서, 보드의 머리를 살짝 들어 어떻게든 마찰을 줄여 속도를 늦추지 않는 방법을 전수해주었다.

스키의 또 다른 매력

기본적으로 봄이 늦게 찾아오는데다 해발 2000m를 훌쩍 넘는 스키장이 대부분이다 보니, 4월 첫 주가 되어야 스키 시즌이 끝난다. 하지만 기차역에는 확연하게 스키 장비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줄었다.

 

요즘은 시즌 마지막 스노보딩을 위해 스위스인 동료들처럼 스노우 리포트 앱을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보며 스위스 어디에 언제쯤 눈이 올 예정인지, 해발 몇 m 지점에서 눈이 있는지 체크한다. 내 생에 처음으로 겨울이 끝남을 아쉬워하고, 따뜻해지는 날씨를 야속해한다.

 

스위스가 산이 많은 지역이고 알프스를 끼고 있다 보니, 옛날에는 겨울이 되면 스키라도 타야 사냥도 하고 놀기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초가 무엇이었든 지금은 몇 세대에 걸쳐 한 운동을 함께 즐긴다.

스키장에 가보면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스키를 가르치기도 하고, 온 가족이 함께 막내를 앞세워 광속으로 슬로프를 줄줄이 내려가면서 종종 나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곤 한다. 간 떨어지는 건 순간이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 참 좋아 보인다. 돌도 안된 아기들이 부모 등쌀에 썰매에 실려 나와 누워있는 걸 보면 스위스 가족들에게는 스키 휴가가 여름 해변 바캉스쯤 되겠구나 싶었다.

 

스키의 스릴을 떠나, 춥고 흐릿한 도시를 벗어나서 곤돌라를 타고 순식간에 올라가면 거짓말처럼 파랗고 쨍한, 강한 햇볕이 쏟아진다. 덕분에 따뜻하기까지 한 구름 위의 산꼭대기에서 기가 막힌 설경을 보고 있자니 그 재미를 살짝 알 것 같기도 했다.

구름 위의 산꼭대기 ⓒ하이디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