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습니까?

인도에서 좀 사는 집안일수록 종교적입니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게 사실 간단한 일은 아니죠. 종교인이 된다는 건, 믿는 종교가 부과하는 계(戒)와 율(律)과 관계 맺는 일입니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戒는 경계할 계, 律은 법 율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종교 안의 법을 따라야 하죠. 종교가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 양식과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종교가 가하는 압력을 견뎌내야 하는 거죠.

 

신부·수녀님이 독신으로 살고, 스님이 머리 빡빡 밀고 채식하고, 원불교 정녀님이 유관순 옷 입고 쪽진 머리 하는 일이 다 그런 거죠. 전에 말했다시피, 저는 연초에 점이나 사주 보러 가는 진화론을 신봉하는 무신론자입니다. 종교적으로 아주 글러 먹은 거죠.

 

엉망진창으로 사는 나 같은 속된 인간이랑은 다르게, 범상하지 않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종교적이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엄마가 따르는 절간 주지 스님이 노래방에서 양주 까고 육포 씹으면서 '백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극락왕생할 날을 찾고 있다 전해라' 부르고 있으면 존경심이 생기겠습니까.

내가 아는 선배가 차라리 종교적일 겁니다. 주말 아침마다 교회 가서 기도하고 다달이 십일조 내거든요. 술 담배도 안 하는 사람이라 내가 존경합니다. 나는 - 특히 종교인인 경우에 - 입만 잘 터는 떠버리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보여줘야죠. 일반인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체화하고 있어야 종교적인 위엄이 서립니다. 제대로 된 종교 규범일수록 도덕적이죠.

알다시피 인도는 굉장히 종교적인 나라라서, 상층 카스트일수록 - 이젠 돈이 곧 계급이 됐지만- 종교적으로 삽니다. 내가 만난 돈 좀 있어 보이는 인도 아저씨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채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족은 어떤 식으로든 힌두 종교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었어요. 으리으리한 집 거실 내벽엔 믿는 힌두교 신을 위한 신당이 작게 꾸며져 있습니다. 기부도 많이 하죠.

 

전에 만났던 젊은 인도 부부는 배경이 좋았습니다. 남편은 HSBC에서 일하다 인도에서 떠오르는 부동산 전자 상거래 회사 임원으로 부임했고, 유명 자동차 부품 회사 오너 일가의 아내는 그곳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이 가족이 돈 벌어서 하는 일이 힌두교 성지에서 사원 짓는 일이더군요. 틈나는 대로 힌두교 경전 공부하고, 휴가 땐 장기간 사원에 머물면서 수행을 한대요.

 

또 다른 인도 아저씨도 외국계 거대 은행에서 일하다 최근 벤처 기업 사장님이 됐는데, 힌두교 단체에서 활동하며 굉장히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퇴근하고 9시면 잠에 들어 새벽 5시에 일어나요. 명상하고 요가하고 출근한다고 합니다. 모두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고, 타인에게 상냥하고 너그러웠어요.

 

이들의 이런 모습은 내겐 자못 도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들은 신적인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삽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힌두 경전을 좇는 삶이고, 자기 몸 안에 신성을 항상 유지하려 애쓰는 듯이 보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종교는, 그것이 인류에 끼친 해악을 고려하기 이전에, 어쨌든 선하고 도덕적인 '좋은 것'의 풍모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위선이냐 아니냐 까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금요일 밤, 경전 읽기 모임


금요일 밤에 인도 경전 '바가바드기타'를 공부하는 인도 아파트 가정집에 초대돼 가봤어요. 불타는 금요일 밤에 사람들이 가정집에 모여 경전을 읽는대서 구미가 당겼습니다. '바가바드기타 = 힌두교의 바이블'정도만 아는 거죠, 내가 뭘 알겠습니까. 얼른 포털에서 검색해봤습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예상대로 고급스러운 아파트였습니다. 80평은 돼 보여요. 힌두신 크리슈나의 연인 라다를 그린 유화가 소파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소파와 TV 거치대를 놓고서도 십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마련된 널찍한 거실이었습니다. 이미 열댓 명이 모여 구루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아줌마, 대학생, 어린이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경전을 읽고 있다니, 꽤 놀라웠습니다.

구루는 갈색 거적을 몸에 두르고, 이마에 노란 물감으로 세로 두 줄을 칠했습니다. 중학교 때 재밌게 봤던 일본 만화 '샤먼킹'의 등장인물 같았어요. 인을 맺고 주문을 외우면 휘리릭 강한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힌두교의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종파가 있습니다. 그가 속한 종파의 지도자의 사진이 옆에 걸려 있는 데 똑같이 이마에 칠을 하고 있더군요. 이 단체만의 표식인 거겠죠.

 

사진 속 주인공은 크리슈나 의식 국제협회(ISKCON·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를 만든 고(故) A. C. 박티베단타 스와미 프라부파다(A. C. Bhaktivedanta Swami Prabhupada)였습니다. '이름이 길면 역시 뭔가 있어보이는 구나'며 감탄했습니다. 1966년 미국 뉴욕에서 단체를 만들었는데, 영어로 힌두 경전을 소개하며 서구권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하더군요. 원전을 강독하진 않고,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한 해설서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앞에 앉은 사람은 힌두교 구루가 아니라 그냥 집주인 아저씨였어요. 힌두 경전에 일반인보단 조예가 깊은 일반인이었던 거죠. 사업가인 그는 금요일마다 집에서 공부방을 열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원랜 진짜 구루를 모시고 경전 강독을 했대요. 그러다 경전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선 구루를 모셔오는 수업을 멈추고 자발적으로 모인 스터디 그룹이었습니다. 모임에선 바가바드 기타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작은 문제들에 대한 토론도 자유롭게 이뤄졌습니다.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사내 정치하는 놈이 싫어요." "우리 애가 친구들이랑 게임만 해요." 이런 사소한 고민들도 아주 진지하게 다뤄지고 서로 의견을 냅니다.

 

그런데 교과서 내용이 꽤 유치했습니다. 물질세계의 문제와 그 원인, 그리고 영적인 해결책이 아주 매끈하게 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해결책이라는 것에 웃음이 났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의 문제 : 자살
이유 : 우울증, 콤플렉스, 좌절, 불만족.

영적 해결책 : 만트라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내적 즐거움, 자신감, 신에 대한 사랑을 갖는다. 다 이런 식이에요.

이혼을 살펴보자면, 이혼의 원인은 신뢰 붕괴, 서로에 대한 몰이해, 무관용, 상대에 대한 끝없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영적 해결책은요? '파트너를 신의 일부이자 한 구획으로 바라볼 것. 신에 바치는 노래(chanting)를 통해 관용을 배울 것.'

오 마이 갓. 기승전갓.

"우리 아들이 왕따를 당하는 데 이제는 자살을 얘기하고 있어요." "우리 남편이 오피스 와이프와 바람을 피워서 이혼할 거예요." 이런 사람들한테 "그게 다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려!"라고 속 편하게 호통치는 것과 같은 거 아닙니까. "이 약 한번 자셔 봐, 온갖 데 다 들어"라고 말하는 각설이 약장수와 다를 게 뭡니까. 그 후론 대충 듣고 거실 구경이나 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수업이 끝나고 저녁을 줬습니다. 거실에 둥그렇게 앉아 참여자들이 각자 집에서 정성스럽게 가져온 음식들을 나눠 먹었어요. 인도식 채식이라 입에 맞지 않아 조금 남겼습니다. 식탁에 있는 그 집 사모에게 "좀 남겨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사모는 웃었어요.

 

그런데 옆에서 음식 나눠주길 거들고 있던 대학생놈이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무조건"이라고 눈에서 불똥 나올 듯이 말하는 거예요. 아까 수업 중에 광신도같이 결연한 분위기로 쓸데없이 질문해댈 때부터 알아봤었습니다.

 

수업 중에 내가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라고 주인 아저씨에게 아주 정중하게 동의를 구했는데도, 혼자 나서서 "수업 시간에 찍으면 안됩니다"라고 날 막아선 놈이었어요. 대학생놈 덕분에 식탁 주변 공기엔 살얼음이 꼈고 나는 좀 머쓱해졌죠.

마담, 아이 헤이트 힘, 아이 리얼리 헤이트 힘~~~!.

대학생놈이 자리를 비운 뒤 사모에게 개그를 시도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나는 내 경험상 국적을 불문하고 충분히 통할만 한 아주 확률 높은 글로벌한 개그를 구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엽게 우는 시늉을 하며 투정을 했는 데도 사모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아주 엄정한 얼굴빛을 냈습니다.

왜 저 친구를 싫다고 하시는 거죠?
저 친구는 매주 모임에 참석하는 아주 신앙심 깊고 성실한 친구예요.


아..... 예.

나는 내 앞에 놓인 풀과 콩을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내 잘못입니다.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금요일 밤마다 각자 집에서 음식 싸들고 한 집에 모여 종교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자체로 열성분자란 사실을요. 그릇을 싹싹 비우고 합장을 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습니다. 

인도의 구루(Guru)

12억 인도 인구 가운데 80% 이상이 힌두교입니다. 나머지 대부분도 종교를 하나씩 가지고 있죠. 인도 사람들의 구루에 대한 추종과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뉴델리 시내 전광판이나 담벼락엔 항상 유명 구루의 사진이 떡 하니 붙어 있어요. 공통점은 털이 많고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수행을 많이 해 공력이 높아지면 인간세 스트레스 따윈 날아가는지 탈모가 없습니다. 사자 갈기 같은 풍성한 털이 눈, 코를 제외한 얼굴 전체를 덮고 있죠.

 

 

이들은 늘 조직에 신도를 모집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행사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름난 구루들은 수백만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면서 록스타처럼 살고 있습니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들도 이들 눈치를 보죠. 연 매출 수천억되는 생필품 회사를 운영하는 구루도 있고요, 병원과 대학교를 수십개 설립한 구루도 있습니다.

 

액션 영화 주인공으로 나선 구루도 있습니다. 영화 이름은 'MSG: The Messenger'입니다. 할리 데이비슨 탄 구루가 신이 주신 권능으로 악의 무리를 화끈하게 처단하죠. 공식 트레일러를 봤는데, 화과산 돌원숭이 손오공처럼 우선 설산의 얼음을 깨고 나타납니다. 미국 프로 레슬링 찹 기술같이 주먹도 아니고 손바닥으로 나쁜 놈을 찹찹찹 때리는 데, 가슴을 한 대 후리면 10미터 이상 날아갑니다.

MSG는 아마 'Messenger of God'의 약자인 듯한데, 내 눈엔 아주 감칠맛도 안 나는 싸구려 화학조미료로 읽힙니다.

이달 초에도 뉴델리의 젖줄 야무나 강에서 '스리스리라비상카'란 털보 구루가 초대형 문화행사를 했어요. 주관 단체가 주장하기론, 350만명이 몰렸답니다. 행사는 현지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됐죠. 

인도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 구루에 미치는 거야? 주말에 차 막히고 사람 많은 데까지 가서 뭐하냐?"

주말에 만난 친구 비크람에게 물었습니다. "다 'Bloody Fucking Idiot'이지." 우리말로 치자면 'xx xx 머저리들'정도 되겠군요. 그는 "난 사람을 따르지 않아. 경전을 따를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니 잘났다 인마. 근데 얘도 사실 별거 아닌 게, 전에 바다휴양지 고아에 놀러 갔을 때 카지노에서 공짜로 주는 치킨 엄청나게 먹었어요. 그 때 비크람은 채식주의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