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 쉐트람

내가 고용한 운전기사 쉐트람이 3개월 만에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떠난 거죠. 내가 하숙하는 가정의 남편분이 한국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집 안에 운전기사가 두 명까진 필요 없어졌습니다.

인도에서 18년 살아온 이 가정에는 든든한 운전기사 '상카'가 있습니다. 10년 동안 일했기 때문에 거의 집사와 다름없습니다. 가족인 셈이죠. "딸 아이 등교와 가끔 내가 장을 볼 때에만 차를 쓸 것 같아요. 기사를 굳이 돈 들여가며 한 명 더 쓰실 필요가 없으실 것 같은데, 어떡하시겠어요?"라는 사모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상카의 월급과 차량 기름 값을 나눠 내기로 했고, 쉐트람은 실직을 하게 됐습니다. 하숙집 사장님은 한국에서 돈을 버는 족족 인도에 송금해야 하는 기러기 신세가 됐습니다.

 

이 가족이 모두 짐을 싸 한국으로 떠나지 않은 이유는 이제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선 외동딸의 교육문제 때문입니다.

인도의 사립학교는 영국식 교육 시스템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는 데다, 평생 외국에서 공부한 학생이 한국의 살인적인 교육환경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니까요. 아이도, 부모도 이를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특례 입학 기준을 충족시키고 나서 아이를 한국 대학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인도에서 자란 우리 딸은 겉모습만 한국인이지 인도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입맛까지 인도 사람이죠. 김치는 입에 대지도 않고, 인도 향신료 맛살라만 찾습니다. 한국어를 읽고 쓰는 일보다 영어를 편안해하죠. 꿈도 영어로 꾼대요. 어찌 됐든 평생을 한국 국적의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상, 본인을 위해서라도 한국 사회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학원을 미국이나 영국으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에서 학부를 했으면 해요. 나중에 우리 딸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난 "아무리 외국에서 생활했다 한들 한국인인 이상, 좋든 싫든 간에 필연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요구받게 되는 순간이 오고 말 겁니다"라고 다소 두루뭉술하게 답했습니다.

인도에서 기사를 채용하는 일은 인맥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가사도우미나 식당 서빙 등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사람들 구하는 게 다 마찬가지죠. 가사 도우미가 필요하면 다른 가정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에게 부탁합니다.

 

"네 친구 중에 우리 집에서 일할 똘똘한 친구 있니?"라고 말하면 며칠 후 친구가 벨을 누릅니다. 그러면 인터뷰를 하고 채용을 결정하죠. 내 운전기사를 구할 때도 상카에게 부탁했죠.

 

일전에 썼다시피, 하숙집에 속한 차량이 두 대기 때문에 나는 사장님의 배려로 차량을 공짜로 임대하고 있습니다. 운전사를 고용해 기름만 넣으면 되죠. 처음엔 한 인도 아저씨가 오셨는데, 운전 실력이 영 꽝이었습니다. 기어 변속을 마구잡이로 했죠. 하숙집 사장님은 "차를 망가뜨리겠다"며 혀를 차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다음에 온 사람이 쉐트람이었어요. 상카의 친구는 아니었지만, 아파트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기사 가운데 한 명의 친구였겠죠. 표정이 별로 없는 쉐트람은 나보다 열두살이 많은 마흔 두살이었습니다. 아내와 20대, 10대인 두 아들과 함께 내가 사는 도시 구르가온 끝자락에 살았죠.

자이뿌르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뒤 정원에서 모닝 담배 식후땡을 하고 있는 쉐트람. 당최 표정이 없는 사람이긴 한데, 사진기를 얼굴 앞에 들이대면 더욱 근엄해집니다. 나중에 둘이 함께 셀카를 찍을 때

그는 나와 계약할 땐 당연히 무직 상태였습니다. 얼마 동안 실직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인도 은행의 임원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자신을 어필했습니다. 시범 주행에서 그는 능숙한 기어 변속을 선보이며 하숙집 사장님의 마음을 샀습니다. "음, 이만 하면 되겠네."

 

나와 인연이 된 거죠. 한 달 기본급은 1만5000루피(약 27만 원), 토요일을 포함한 주6일 근무였습니다. 시간 외 근무수당은 1시간당 50루피(약 900원)였어요.

나는 고용주, 그는 고용인

쉐트람은 영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영어로 된 지명이나 숫자만을 읽고 말하는 정도입니다. 조금은 불편했지만, 우리는 별문제 없었습니다. 쉐트람은 뉴델리의 지리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고, 나에겐 구글 맵이 있거든요. 1G부터 3G를 오가는 모바일 환경이지만, 구글맵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인도에서 구글맵이란 - 과장해서 말하자면 - 구글이 알파고 이전에 개발한 또 다른 라플라스의 악마입니다. 위치 정보를 켜고 목적지를 초기값으로 입력하면, 가장 빠른 시간에 당도할 수 있는 경유 도로와 도착 시각이 뜹니다. 혼잡한 도로는 빨간색으로, 소통이 원활한 구간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죠.

 

스파이더맨이 거미줄 다섯방은 쏴야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이 복잡한 뉴델리의 도로를 어찌 그리 완벽하게 데이터베이스화 시켜놨는지 놀랍습니다. 구글맵이 예상한 그대로 나의 여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경외감과 함께 소름이 돋죠.

외계 문명이 지구를 침공했을 때
구글의 데이터센터를 해킹할 수만 있다면,
일주일 걸릴 세계 정복을
단 하루로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출발하기 전 목적지가 입력된 구글맵을 쉐트람에게 보여주면, 그는 "오께(오케이)" 혹은 "티케(Thike·오케이와 같은 뜻의 힌디어)"라고 말하고 나를 실어나릅니다. 목적지 근처에서 아무래도 헷갈리다 싶으면 나에게 "매쁘(Map)?"라고 합니다. 나는 구글맵을 켜고 "히어 히어"라고 말한 뒤 "고 스트레이트", "턴 라이트" 혹은 "턴 레프트"라고 말하죠.

 

차에서 내릴 때면 나는 보통 "투(two) 오어 쓰리(three) 아워(hour)"라고 말했습니다. 2~3시간 정도 걸릴 테니 대기하라는 말이죠. 이러면 그는 항상 "오께"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점심이나 저녁식사 약속이었기에, 쉐트람은 그 시간 동안 알아서 끼니를 해결하고 나를 기다리죠.

인도의 전형적인 길거리 먹을거리입니다. 세모난 건 '사모사'이고 둥그런 건 '카조리'입니다. 밀가루를 기름에 튀겨 만든 인도식 만두죠. 으깬 감자, 카레 양념, 야채로 속을 채웠어요. 점심 저녁식사 시간 때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입니다. 1000원~2000원 정도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요.

사실 그 시간에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식사는 했느냐?"는 간단한 영어도 쉽게 알아듣지 못했거든요. 내가 자리를 마치고 전화를 걸어 "아이(I) 고(Go)"라고 말하면, 그는 나를 내려줬던 곳에 차를 댑니다. "레츠 고우 투 더 홈." "오께." 우리가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곤 이게 전부였어요.


쉐트람의 입 주변엔 구순구개열 수술 흔적이 어렴풋하게 있습니다. "쉐트람 입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라는 하숙집 사모의 말을 듣고서야 쉐트람의 흉터가 눈에 띄었습니다. 감각이 둔한 나는 처음엔 알지도 못했어요.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관심이 없었던거겠죠.

 

그의 생김새나 차림에선 궁기가 돌았습니다. 해진 셔츠 두 세 벌을 늘 돌려 입었고, 가끔 몸에서 희미한 쉰내도 났죠. 첫 한 달은 오토 릭샤와 버스로 출퇴근했어요. 내 업무가 늦어 자정 무렵 집에 오는 날이면 그는 차 안에서 잠을 잤습니다. 버스나 오토 릭샤 편이 끊겼으니 집에 갈 방도가 없다는 이유였죠.

사실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면 돼요. 그런 날이면 난 사전에 합의한 추가 근무 수당과 별도로 택시를 타고 가도 남을 정도의 넉넉한 돈을 그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차에서 잠을 잤습니다. "오께, 오께"라면서요. 나는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늘 맘이 편치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쉐트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게 되면서 한 시름 놨습니다. 그의 어설픈 영어와 몸짓 발짓을 조합한 결과, 나는 "큰아들이 타던 오토바이였는데, 아들은 이제 다른 주로 일하러 떠나서 내가 타고 다닐 수 있다"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지난달이었어요. 차에 기름이 없어 주유소에 갔죠. 내 수중에는 500루피밖에 없어서, 쉐트람에게 그 돈 전부를 건넸습니다. 쉐트람은 차 밖으로 나갔고 나는 조수석 좌석에 그대로 앉아있었죠.

 

한참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돌려 주유소 기계 계기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420루피를 채우고 멈추는 거예요. 내 모습을 확인한 쉐트람은 당황하는 듯 보였습니다. 주유소 직원과 한 차례 속닥속닥 하더니 다시 80루피어치 기름이 채워졌습니다.

 

80루피라고 해봤자 1420원입니다. 고작 80루피로 날 속이려 하다니, 우리의 신뢰 관계가 그 정도로 무너질 정도였다니. 인간적인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를 추궁하진 않았습니다. 화를 내기도, 변명하는 그의 모습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를 조금은 쌀쌀맞게 대했어요.

'네가 고작 80루피 때문에 날 속인 것을 알고 있어'라고 그가 알기를 바랐던 것처럼. 그가 내 눈치를 살피길 원했습니다.

주유소를 떠나 차 안에서 쉐트람은 내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아마도 주유소에서의 일을 해명하려는 듯했죠. 영어가 아닌 힌디어였기에 나는 이해하길 포기했어요. "노노노노, 오케이 오케이"라는 단답을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돋아선 신경을 억지로 눌렀습니다. '고작 이런 일 따위로 신경 쓰긴 싫다'는게 솔직한 심경이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쉐트람을 여느 날 처럼 대한다고 대했습니다만, 그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심기까지 헤아려 행동하진 않았습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뒤, 내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잔인하게 말하자면, 나는 고용주, 그는 고용인 처지였으니깐요.

쉐트람은 이달 초 "집안 행사로 8일(화요일)부터 3일 정도 휴가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실직은 사실 지난달 말에 결정 난 것이어서, 나는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죠. "잘됐네, 이참에 7일까지만 나오면 된다고 하지 뭐." 힌디어를 구사하는 하숙집 사장님이 대신 말을 전했습니다.

 

아주 다행히도, 우리는 쉐트람에게 다음 일터를 소개해줄 수 있었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 가정집에서 기사를 찾고 있었거든요. 집안일 보고 다음날부터 그 집에서 일하면 된다고 안내했습니다. 

출장, 그리고 작별

그런데 금요일인 4일 갑자기 출장 결정이 나서, 서둘러 짐을 쌌습니다. 오후 5시였습니다. 차로 10시간 이상 걸리는 라자스탄주의 한 도시로 가야 됐어요. 다음 날엔 무조건 그 도시에 도착해 일요일까지 업무를 끝내야 했습니다.

전형적인 비즈니스 출장길에서의 호텔 사진. 그러나 저는 그냥 고무줄바지 입고 출장을 떠났습니다. 맨발에 샌들도 추가요.

도저히 10시간 이상 차로 달릴 수 없었기에 중간쯤에서 자고 가기로 했습니다. 5시간 정도 달리면 갈 수 있는 자이뿌르를 선택했죠. 관광도시라 저렴하고 좋은 호텔이 많거든요. 금요일 밤 자이뿌르에 도착해 하룻밤 묵고 토요일 아침 4시간 달려 도착. 하룻밤 거기서 자고 일요일까지 일한 뒤, 일요일 저녁 다시 자이뿌르에 와서 숙박. 월요일은 한나절 시내관광 후 귀가. 3박 4일의 여정이었죠.

 

라자스탄이 고향인 쉐트람과 같이 가게 됐습니다. "갈 수 있겠느냐"는 내 말에 "오께"라고 답했습니다. 후다닥 케리어에 짐을 쑤셔넣고, 차에 올랐어요. 40분 걸려 쉐트람의 짐을 가지러 그의 동네에 들렀습니다.

 

인도 전통 사리를 노랗게 입은 아내가 검은 백팩을 들고 나와있더군요. 옷가지들을 단출하게 넣었는지 가방이 가벼워보였습니다. 14살 된 아들이 엄마 옆에서 까불더라고요. 나는 이들에게 웃으며 합장을 했습니다. 쉐트람의 아내는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내 인사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나를 신기해하면서도 부끄러웠는지 몸을 배배 꼬면서 악수했습니다. 


아고다 어플을 이용해 가는 길에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나는 내 방만 예약하려 했습니다. "기사 숙소는 어떻게 하나요?"라고 묻자 하숙집 사장님이 "보통 기사에게 1000루피 정도 주고 자고 오라고 하면 저렴한 숙소에서 자고 와"라고 말하더군요.

 

흔들리는 차 안에서 용을 쓰며 신용카드 정보와 핀 번호를 입력하며 예약을 시도했습니다. 모바일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아 마지막에서 자꾸 에러메시지가 뜨는 거예요. 몇 번 해보다가 포기하고 호텔로 전화를 해보니까 "예약 됐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안도하고 5시간 30분을 달려 저녁 10시 30분쯤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이런 젠장, 실패라고 생각했던 예약이 모조리 성사돼 있었던 겁니다. 방 4개가 졸지에 내 이름으로 예약이 돼 있더군요. 망할 머릿속이 하얗게 돼버렸죠. 패닉이었습니다.

따져 물어도 "니 예약 때문에 우린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없었잖아, 안 그래? 우린 어떻게 조치할 수 없고, 억울하면 아고다랑 상의해 봐"란 말만 주구장창 되풀이하더군요.

 

이제 와서 뭘 더 어쩌겠습니까. 호텔 직원을 앞에 두고 허탈하게 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남는 방 3개 중 하나를 쉐트람에게 한 방을 내줬습니다. 하룻밤 묵는 데 3만5000원쯤 되는 (한국 사람 기준에는) 비싸지 않은 호텔이었지만, 인도 수준으론 정갈하고 고급한 호텔이었어요. 대부분의 투숙객이 외국 관광객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자이뿌르 호텔 야외레스토랑에서 맥주 마시다 전화 받는 쉐트람. 배 나온 아저씨입니다. 3일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다며 까칠해진 회색 수염을 어루만졌죠.

늦은 저녁을 호텔 식당에서 그와 함께 했습니다.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은 건 처음이었어요. 밤이 깊어 식당 영업이 끝이 난 상태였지만, 간단한 메뉴는 시켜도 된다더군요. 난 토스트 빵과 잼, 콜라를, 그는 인도 커리 달과 로띠, 라이스를 주문했습니다. "양이 모자라면 더 시켜도 된다"는 말에 라이스 하나를 더 시켜서 싹싹 비우더군요.

 

쉐트람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수준의 호텔이었는지, 그는 조금 어색해했습니다. 식당 종업원의 극진한 서빙이나, 짐을 들어 주겠다는 호텔 보이의 제안에 쭈뼛쭈뼛 대더군요. 기름칠 덜한 기계처럼 경직된 듯 보였죠.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몇 시간 전에 본 그의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아, 쉐트람과 잘 왔구나. 그와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방구석에서 세 번의 통화 시도 끝에 아고다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었고, 나와 쉐트람이 없는 두 개방의 예약을 취소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린 자이뿌르를 출발해 4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고, 거기서 온종일 나는 취재를 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한국 회사직원들의 호의로, 그들 숙소에서 잘 수 있었죠. 쉐트람에겐 따로 돈을 쥐어주고 "어디 가서 자고 오라"고 했습니다.

 

쉐트람은 군소리 없이 참 열심히도 나를 실어날라 줬어요. 일요일 늦은 오후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4시간 넘게 달려 자이뿌르의 호텔로 갔습니다. 이번엔 난 쉐트람 방까지 함께 예약했어요. 전전날 자이뿌르에서 묵었던 호텔과 비슷한 수준의 호텔이었습니다. 마지막날 그에게 아늑한 잠자리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오후 9시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서 전망이 확 트인 호텔 2층의 야외 레스토랑으로 갔습니다. 장식된 노란 백열전구로 분위기는 제법 그럴 듯했습니다. 출장 업무가 모두 끝났기에 개운했습니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포근하고 청량하게 느껴지더군요.

 

우린 맥주를 마시며 내가 가져온 담배를 느긋하게 피웠습니다. 나는 중국식 칠리 치킨과 계란 볶음밥을, 쉐트람은 치킨커리와 로띠, 라이스를 주문해 먹었죠. 


"쉐트람, 이츠 아워 라스트 드라이빙!" "아아, 라스트 드라이빙." 그러면서 그는 손을 합장하고 나에게 "아임 쏘리, 쏘리"라고 얘기했습니다. "와이? 노노~노노!" 나는 손을 저으면서 내 눈앞에 갖다놨습니다. 그는 "에브리팅, 땡큐, 땡큐"라고 답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완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 식당에서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짧은 영어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면서요. 모레 그가 가야 했던 가족행사는 그의 누이 아들의 결혼식이었습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 누이와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살 거라고 했습니다. 나는 서른이 됐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고, 한국에선 결혼하기에 그리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설명했죠.

 

스물넷인 그의 아들은 하리아나주 전자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는 1년 뒤에 아들을 장가보내려고 한다고 했죠. 그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숙집 사장님이라는 걸 설명했죠. 계속 같은 아파트에서 일하게 됐으니까 가끔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쉐트람은 말했습니다.

하와마할 겉모습. 꼭대기까지 올라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1799년 붉은 사암으로 5층 규모의 성을 우람하게 지었어요. 벌집 모양으로 겉모양을 내 오밀조밀한 멋도 있습니다. 바람이 쉬이 드나들 수 있도록 창을 많이 내 일명 '바람의 궁전'. 궁정의 여인들에게 자이뿌르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성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있는 놈들은 '바람' 드는 '창문'이 많은 '높은 건물'로 여성을 데려갔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을 먹고 쉐트람과 함께 자이뿌르를 관광했습니다. 라자스탄의 주도인 자이뿌르는 옛 무굴 왕실의 위용을 그대로 보존한 도시거든요. 구시가는 사방으로 덮인 성곽의 붉은 색채 때문에 '핑크 시티'로 불립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궁전인 시티팰리스와 하와마할을 둘러봤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독특한 형상으로 된 조각품이 모인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도 봤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서로 가진 휴대폰으로 상대 모습을 찍었습니다.

 

같이 셀프 카메라를 찍기도 했죠. 콜라를 사서 나눠마시기도,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도 했죠. 내 휴대폰 정액금이 바닥나서, 충전하기 위해 자이뿌르 내 통신사를 뒤지기도 했습니다. 차를 타고 일방 통행로를 역순으로 가로지르다 경찰에 발각돼 200루피를 뜯겼어요.

 

오후 2시에 모든 관광을 마치고 자이뿌르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니로스'를 구글맵으로 "턴 라이트, 턴 레프트"하면서 찾아 갔습니다. 1949년에 문을 연 이 식당은 론리플래닛 첫머리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었어요.

메뉴판을 확인한 쉐트람이 놀란 눈치로 나를 바라보더군요. 메뉴 하나 값이 그의 하루 일당보다 높았거든요. 내가 "아워 라스트 드라이빙"이라고 말하자, 그는 엷게 웃었습니다.

스위트 라씨와 콜라, 탄두리 치킨과 치킨 카레, 싱가포르식 비빔밥과 로띠, 플레인 라이스를 시켜 놓고 즐겁게 나눠 먹었습니다. 불법 주차한 차량이 맘에 걸렸는지 쉐트람이 가끔 뒤를 돌아 차량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해보긴 했지만 말이죠. 비싸고 유명한 만큼 맛은 훌륭했습니다.

 

"레츠 고우 투 더 홈." "오께." 그렇게 또 5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했습니다. 오는 도중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쉐트람은 흥얼거렸습니다, 내가 춤추는 시늉을 하자 그가 웃기도 했죠. 인도사람들은 "티케"라고 말할 때면 오른손을 내보이고 뒤집는 제스쳐를 하는데, 쉐트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티케"라고 말하며 똑같이 흉내 내자 쾌활하게 웃더군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흙밭 아무 데나 소변을 갈기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매달 10일이 월급날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자동차를 주차해놓고 차 키와 노트를 가지고 집으로 오라고 말했죠. 쉐트람은 트렁크에 있는 노트에 매일 시간 외 수당을 기록해놓거든요.

 

그는 "괜찮다. 기본급만 달라"고 했습니다. 지난 4일간의 동행을 내가 베푼 호의로 받아들이는 듯 했습니다. 나는 잔말 말고 노트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달 시간 외 수당은 1100루피 정도 나왔더군요. 그보다 훨씬 넉넉하게 쳐서 월급봉투를 건넸습니다.

 

하숙집 사모는 짧은 힌디어로 "이제 다른 한국인 가정에서 일하게 됐으니 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 앞으로 스케쥴을 상의하고 가라"고 그를 안내했습니다.

"쉐트람, 바이 바이" "오께, 바이 바이."

사모와 인사할 때 표정이 없던 쉐트람은, 내 작별인사에 유독 환하고 크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별것 아닌 인사였지만, 내 마음은 빨강 과즙이 꽉 찬 자몽같이 충만해졌어요.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죠.

쉐트람에게 보내는 편지

요새 나는 여름을 앞둔 인도 나무들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붉은 꽃을 떨어뜨리는 나무 바로 뒤로 낙엽이 지는 나무가 있어요. 한국에선 여름이 되면 나무는 푸르게 우거지고,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엔 단풍이 들고 낙엽도 지는 데 말이죠. 봄에 낙엽이 지다니, 인도의 여름이란 한국 겨울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극악한 환경인가 봅니다.

그럼에도 인도는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인도에선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보는 기쁨이랄까, 충격이랄까, 경이랄까. 하여간 그런 독특한 미감이 있습니다. 

개소리이긴 한데요, 나는 새끼 돼지 머리통를 물고 있는 야생 들개를 집 근처 힌두사원에서 봤을 때도 비슷한 이질감에 휩싸였습니다. 힌두 사원 앞 공터에서 새끼 돼지는 여러 들개들에게 처참하게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죠. 충격적이었어요.

 

인도에서 죽음과 삶은 확연히 분리되지 않은 채 맞닿아있었습니다.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내 삶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그토록 손쉽게 틈입해올 수 있는지 쉽게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나란 인간이 얼마나 안온한 환경 속에서 구축되어 왔는지 안도하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야성을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삶의 안전과 안정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무조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복지'를 인류가 개발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혹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거든요. 

구르가온 주택가 골목길에서 만난 아이들. 담벼락을 넘어온 꽃나무를 바라보며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걸으면 봄기운이 짙게 느껴집니다.

아내와 아들을 부양해야 하는 당신에게 운전사의 일이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같이 불안한 것이겠죠. 나는 당신을 부득이 해고했지만, 곧바로 일할 수 있는 다른 한국인 가정집을 소개할 수 있어서 퍽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퍼머넌트(permanent)? 퍼머넌트?"라고 되물으며 그 가정에서도 계속 일할 수 있는지 물어봤죠. 별다른 사고를 내지 않는 이상, 퍼머넌트로 일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집안은 한 달에 두 번씩 일요일에 교회를 가기 때문에, 일요일에 두 번 일하는 대신 기본급은 1000루피 올려 줄 거예요.

 

근데 그 집 주인이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기사가 차에 넣은 기름은 훔쳐가지 않는지 확인한대요. 나는 솔직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고용주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 집을 거쳐 간 기사들이 그런 일을 무시로 저질렀다고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아직까진 한국 가정집에서 일하는 게 권위적이고 거만한 인도 사장님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떤 운전 기사냐는 그 집 주인의 사전 질문에 나는 "고속도로에서 항상 80~100km/h로 달리는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당신은 항상 시속 80~100km를 유지했습니다. 단 한 순간도 과속하지 않았죠.

 

처음엔 답답하긴 했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이 모는 차는 안전하구나'라고 줄곧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속도로 달려주세요.

 

그런데 내 속에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의문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나와 4일간 동행하면서 왜 구두를 두 개나 가져와 번갈아 신은 거죠?

특히 마지막 날 호텔에서부터 당신은 새로 산 듯한 붉은빛의 말끔한 구두를 신었습니다. 나와 처음이자 마지막 여정에 대한 당신 나름의 예의인건가요.

자이뿌르의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에서 쉐트람이 갑자기 내 가방을 메주었습니다. 그리고선 저돌적으로 앞장서 갔죠.

나는 그 붉은 구두의 의미를 당신이 내게 건네는 아쉬운 이별의 송사 정도로 - 언제나 그렇듯 고용주의 입맛대로 - 해석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아파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그 때 물으려고 했는데 역시나 관두겠습니다. 이 내용을 손짓 발짓 써가며 내가 제대로 전달할 수도 없겠거니와, 당신 또한 내 질문을 제대로 알아 듣기 힘들 듯 해서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남겨두는 맛이 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3개월간 고생 많았습니다. 뭐,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우리는 꽤 근사하게 끝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