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이민의 풍경
1970년대 한국 사람들은 풍요로운 미래의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학벌도 직장도 버리고 가족을 뿌리째 뽑아다 바다 건너 기회의 땅에 옮겨 심었다. 이모네도 부르고, 고모네도 부르고, 삼촌네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30여 년 동안 한국에 한번 돌아가지 않고 미국인이 되어 살았다.
미국에는 워낙 다양한 이민자 집단이 있지만,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특히 이민이 흔한 멕시코는 그 풍경이 우리와 좀 다르다. 1980년대부터 급증한 멕시코 사람들의 이민 목적은 한국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식들이 좀 더 좋은 여건에서 더 많은 기회를 누리며 자랄 수 있게 돈을 버는 것.
그러나 우리와는 다르게 멕시코 사람들은 가족이 같이 가지 않는다. 아빠만 간다.
남겨진 아이들
미국에 거주하는 1,160만 명의 멕시코 인구 가운데 (2014년 기준) 69%가 노동자로 일하는 남자다. 아빠가 미국에서 번 돈을 멕시코에 다달이 부치면 멕시코에 남은 엄마는 그 돈을 모아서 아이들을 돌본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생기면 엄마도 건너가 내니(nanny, 보모)가 된다.
엄마와 아빠가 모두 미국 땅에 가있지만 부부가 같이 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둘이 번 돈을 다달이 멕시코에 부치고, 그 돈이 쌓이면 이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합친다. 그마저도 한꺼번에 못 가서 몇 년에 한 명씩 차례로 연쇄 이민(chain migration)을 간다.
엄마 아빠 손잡고 비행기를 탔던 한국의 이민 1.5세들과는 달리 멕시코의 아이들은 아빠나 엄마 또는 부모 모두와 떨어진 채 멕시코에 남겨진다. 미국 국경에 인접해 역사적으로 이민이 가장 빈번한 몇 개 주의 경우, 부모 없이 사는 아이들의 비중이 최고 50~70%에 육박한다.
전체적으로 파악된 수치는 없지만 뉴저지에 사는 멕시코인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아이들이 아빠와는 9년 넘게, 엄마와는 3년 반 정도 떨어져 지낸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을 가리키는 '남겨진 아이들(left-behind children)'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두 번의 이별
아이들을 남겨두고 부모가 먼저 떠나는 연쇄 이민이 가능한 데는 라틴아메리카의 끈끈한 대가족 문화가 한몫을 한다.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는 물론, 친척 아줌마, 이웃 아줌마, 대모(godmother) 등등 확대가족에서부터 지역사회까지, 남겨진 아이들을 돌보는 데 관여하며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직업을 가진 멕시코의 친엄마들은 정작 자기 자식은 돌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품고 산다. 이런 성장환경은 남겨진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다. 부모 마음이야 오직 아이들 잘 되길 바랄 뿐이지만 남겨지는 아이들은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에 젖는다.
영화 폭스캐처의 인물 분석에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보호자와 애정 어린 유대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아이의 사회정서 발달과 심리적 건강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불안한 관계를 경험한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또래들과 어울리는 데 주저하는 편이다. 공격성과 적대감을 띠는 경우도 있어 또래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시간이 흘러서 가족이 다시 같이 살게 된다 해도 그간 정든 '멕시코 엄마'와 이별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가 된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낯설어진 부모 자식 관계 역시 하루아침에 회복되지 않는다. 형제자매 중에 누구 하나가 먼저 부모 곁으로 가게 되기라도 하면 남겨진 아이는 선택받지 못한 슬픔과 질투를 느낀다.
부모의 빈자리
아이들은 주변의 어른들을 관찰하고 모방하면서 사회적 능력을 습득한다.
부모가 수틀릴 때 큰소리로 화내면 아이들도 제 친구들한테 그렇게 행동하고,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이해시키면 그 역시 쫓아서 배운다.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는 부모가 곁에 없는 남겨진 아이들은 이렇게 보고 배울 기회가 많이 없다. '멕시코 엄마'들이 챙겨주긴 하지만 자기 애들도 돌봐야 하고 시간도 모자라며, 남의 집 아이들의 발달을 신경 쓸 정도의 관심이 없기도 하다.
부모가 가까이서 도와주거나 힘든 게 뭔지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하다 보니 아이들은 공부나 학교생활에서 뒤처지기도 한다. 친구관계, 이성 교제, 정체성 등 10대에 들어선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들도 방치된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진학에 실패하고 혹은 어린 엄마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모님과 워킹맘
태평양 건너 나라의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크게 낯설지 않다. 건설현장과 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조선족 동포들이 그렇고, 많은 가정에서 내니로 일하는 '이모님'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이모님들께 아이를 맡기는 워킹맘도 그렇다.
좀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내린 선택들이 되려 일상적인 상처를 반복하고, 자식 대신 회사를 있는 힘껏 먹여 살려 벌어온 돈으로 내 아이를 남의 손에 부탁한다.
애착(attachment) 이론의 대가인 바울비(John Bowlby)는
'애착이란 사람과 사람 간의 시공을 초월하는 강력한 유대감'이라고 했다.
부모 그늘에서 자란다고 다 잘 크는 건 아니듯 부모의 물리적 부재 자체가 유해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연구를 보면 멕시코의 남겨진 아이들 중에도 매일 저녁, 엄마 또는 아빠와 (주로 엄마) 전화통화 등을 통해 학교에서 생긴 일, 만나는 이성친구 등에 관해 대화하고 상의하는 경우에는 아이들이 부모와 같이 사는 것 못지않게 안정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빠의 고유한 역할
부모와의 시간이 부족한 아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정서적인 부분에서 시작된다. 불안하고 공허한 정서는 공부에 마음을 붙이기 어렵게 하고 친구들 앞에서도 위축되게 한다.
그러나 한계는 있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에 질적으로 공을 들이면 상쇄할 수 있고, 특히 아빠가 참여하면 더 좋다. 보통 아이를 품고 낳고 젖 물리는 엄마들이 주 양육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아빠 역시 아빠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는 메인 플레이어다.
아빠도 엄마가 하는 웬만한 일들을 똑같이 잘 할 수 있고 아이들과 엄마 못지않게 끈끈한 관계를 맺는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신체를 많이 쓰고 모험적이며 창의적인 아빠와의 놀이를 좋아하는데, 아빠와의 놀이 경험은 아이의 사회능력 발달에 크게 기여한다.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견고한 아이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정서를 보이지만 엄마와 아빠 모두와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일수록 사회성이 높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한다. 특히 아빠와 애착이 좋은 아이들이 또래들과 잘 어울리고 아동기와 청소년기 내내 문제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개인의 선택
멕시코의 남겨진 아이들은 부모의 부재 말고도 이겨낼 것이 또 한가지 있다.
바로 사회의 인식.
이민 간 부모들은 지역사회를 등지고 자식을 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남겨진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전해 받는 돈도 미디어가 보도하는 '불법'의 이미지로 얼룩진다. '저 집 엄마 일하잖아'로 요약되는 워킹맘과 그 집 아이들에 대한 인식도 비슷해 보인다. 미국도 한국보다 나을 건 없다.
앤 해서웨이가 잘 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로 나온 영화 '인턴'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음식 준비가 필요한 유치원 행사 이야기를 나눌 때 전업 엄마들이 워킹맘 앤 해서웨이에게 아보카도랑 양파랑 토마토랑 대충 다져서 섞으면 되는 과카몰레를 배정해주면서, 그것도 '사와도 된다'고 친절하게 제안한다.
멕시코의 부모들처럼 현대를 사는 어른들은 아이와 가족을 위해서든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든 어려운 선택들을 거치며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서로 다른 부모와 그 아이들, 각각이 처한 상황과 사정들에 만병통치약 같은 해결책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선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정해진 운명처럼 대가를 받아들이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멕시코 사람들이 그렇듯이,
개인이 내리는 선택이 개인적이지만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