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을 생각하는 디자인

Editor's Comment
'디자인'이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시각 디자인 외에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고하는 하나의 틀을 디자인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터랙션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인터랙션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 앨런 쿠퍼를 들어보셨나요? '인터랙션 18, 디자인으로 연결하다' 두 번째 미리보기에서는 Interaction 18 컨퍼런스에 다녀온 이진재 저자가 키노트 발표자였던 앨런 쿠퍼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이 외에도 해당 컨퍼런스의 다양한 세션이 담겨 있는 리포트 전문은 4월 26일(목) 오후 5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인간 중심 디자인은 디자인 업계를 넘어 산업 전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과연 기술 발전과 인간 중심 디자인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까? 오히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앨런 쿠퍼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부터 그의 키노트에 귀 기울여 보자.

세션: 오펜하이머의 순간(The Oppenheimer Moment)
발표자: 앨런 쿠퍼(Alan Cooper, Founder of Cooper)

당신이 거대한 소셜 미디어 회사에서 일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사용자가 보고 싶은 게시물을 보여주고, 그렇지 않은 게시물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사용자 데이터에 접근해서 분석한다. 덕분에 거의 완벽한 사용자 타깃 광고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러시아 정부 해커가 미국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 당신이 만든 플랫폼을 사용했다. 러시아 해커들은 영향받기 쉬운 타깃을 선정하여 그들의 뉴스 피드(news feed)를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 혼란, 거짓말로 채웠다.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일이 대의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당신은 소프트웨어 회사의 연구자로서 대화형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한 학습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했고, 당신의 AI를 적용할 수 있는 챗봇*을 만들었다. 당신의 상사는 이 작업에 감동받아 웹에 이 챗봇을 공개하도록 허락했다.

* 메신저에서 일상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채팅로봇 프로그램.

 

그러나 해커들이 당신의 챗봇을 발견하자 곧 거짓말, 편견, 그리고 끔찍한 것들로 챗봇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당신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인종차별과 편협, 증오로 가득 찬 독설을 내뱉는 챗봇으로 변했다. 상사는 즉시 가동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작업이 아주 파괴적인 무언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일들은 왜 일어나는 걸까?
어렵게 만든 기술이
왜 악마의 대리인이 되는 걸까?

194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주도 하에 거대한 예산과 최고의 물리학, 수학, 공학 인재들이 여기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 핵폭발을 본 순간, 그는 그가 끔찍한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펜하이머의 순간'은 좋은 의도로 만든 제품 혹은 서비스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말한다. 광고를 위해 만든 제품이 대의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제품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가 만든 알고리즘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을 예로 들 수 있다.

시스템의 문제

우리가 흔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눈에 잘 보이는 작고 단순한 시스템에나 있는 문제다. 실제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는 눈에 잘 안 보이는, 크고 복잡한 시스템* 속에 숨어있다.

* 앨런 쿠퍼는 사회 구조, 조직 체계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시스템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어딘가의 아주 작은 누수 정도로 사소하고 세분화되어 있다. 거기에는 악의도, 악마도 없지만 이 작은 문제가 모여 거대한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단초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거대한 재앙을 막기 위해서 사소한 문제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나만 결백하다고 선한 의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해관계자 모두 제품 혹은 서비스, 시스템, 비즈니스 모델과 그 취약점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들이 모여 큰 문제가 되기 전에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다짐은 종종 기업의 존재 의의인 수익 창출에 가려 흐려진다. 사악해지지 말자는 목표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둘 다 추구하는 좋은 목표는 없을까?

앨런 쿠퍼가 말하는 인간 중심 디자인

앨런 쿠퍼는 후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좋은 선조가 되자고 제안한다. 이윤 추구를 위해 시스템과 생태계를 파괴할 필요가 없다. 버진, 코스트코, 파타고니아는 좋은 사례다. 돈도 벌고 사회 시스템과 생태계도 지킬 수 있다. 그는 인터랙션 디자인 분야를 개척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좋은 선조가 되기 위한 디자인이 무엇이고,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정립하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좋은 선조처럼 생각하기(Ancestry Thinking)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크게 가정(assumption), 외부 효과(externalities), 시간 척도(time scale),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씩 들여다보자.

 

1. 우리는 무엇을 가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가정에 근거해 문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가정이라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처음의 선의는 변질되기 십상이다. 인터랙션 디자인 업계에서는 한동안 화장실 자동 물비누가 흑인의 손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종차별 이슈가 있었다. 피부가 어두우면 센서에서 보내는 빛을 반사하지 못해, 손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인간의 손은 모두 같다는 가정을 사전에 확인했다면 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우리는 어떤 외부효과를 만들고 있는가

외부효과는 우리가 주목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우리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쓰레기 차는 쓰레기를 없애지 않는다. 쓰레기를 내 집 앞에서 매립지로 옮길 뿐이다. 남겨진 쓰레기 처리는 우리 후손 몫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효과는 사실상 없다. 우리 관심 밖으로 밀어낼 뿐이다. 불난 집 문을 닫고, 모른척하는 것과 다름없다. 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불은 우리 아이들이 꺼야 한다.

 

카풀 서비스는 어떨까. 타는 사람은 너무 좋다. 그러나 운전자 복지는 생각해본 적 있는가. 대형 할인 마트도 마찬가지다. 고객들이야 좋다.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살 수 있으니. 그러나 그 가격은 직원들 인건비를 희생해서 만든다.

 

3. 어떤 시간 척도를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든 제품을 지금에 맞춰 디자인한다. 앞으로 이 제품이 언제까지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은 제쳐 두고 현재 이 제품이 어떻게 사용되고 팔릴 것인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앨런 쿠퍼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연도 표기를 위해 숫자 네 자리가 아닌 두 자리만 사용했고, 이는 Y2K 버그*의 원인이 되었다.

* 컴퓨터가 연도 표시의 마지막 2자리 만을 인식하여 1900년 1월 1일과 2000년 1월 1일을 같은 날로 인식하게 되므로 예상되는 컴퓨터 장애로 인한 대혼란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의 수명 주기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자본주의 체계, 기술, 보상 체계, 산업 체계 모두 현재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10년 후, 30년 후, 더 나아가 우리가 죽은 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용자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질문해야 한다.

Interaction 18 ©이진재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기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들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기존에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던 지엽적인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앨런 쿠퍼는 문제 해결 방법으로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기(thinking backwards)를 제안한다.

 

그는 한발 물러서서 주변 환경과 생태계가 어떻게 엮여있는지 맥락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 곧바로 문제 해결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수평적 사고, 5 WHY 기법* 혹은 동양의 전체론적 사고와 유사하다.

* '왜'라는 질문을 연속으로 5번 던지면서 표면적인 것이 아닌, 근본 원인을 찾는 것

 

한발 물러나면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우버는 차 한 대도 소유하지 않고 세계적인 택시 회사가 되었고, 에어비앤비는 집 한 채 없이 세계적인 숙박 서비스가 되었으며, 알리바바는 물류 창고 하나 없이 높은 가치의 물류 회사가 되었다. 이들은 정부 규제를 회피하며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모델을 만들었지만, 차는 누가 관리하고, 집은 누가 관리하며, 또 물류 창고는 누가 관리하는 걸까.

 

이런 방식과 메커니즘을 규제하는 법률 제정이 해결책은 아니다. 메커니즘은 바뀌기 마련이고, 이들은 이를 회피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개별적인 작동 원리를 보기보다 전체 맥락을 통해 기대효과를 봐야 한다.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자

하류에서 빠르게 흐르는 엄청난 양의 강물을 막는 것은 어렵겠지만, 상류로 올라가 천천히 조금씩 흐르는 물은 조그만 삽으로도 막을 수 있다. 많은 실무자가 이러한 사고를 전체 프로세스 상에서 이른 시점에 도입한다면 더 효과적이고, 사악해지는 일을 사전에 차단하고, 좋은 선조가 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앨런 쿠퍼는 우리에게 사악해지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후손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 위해 개인이 직접 행동하기를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해 질문하고, 같이 토론하고, 협동하고, 결국 행동까지 이어질 것을 당부한다. 한 명 한 명 행동할수록 이런 생각은 점점 성장하고, 확성기가 되고,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프로세스가 된다.

 

그는 현재 Jacobs Institute for Design Innovation에서 좋은 선조처럼 생각하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좋은 기술이 어떻게 나빠지는지에 대한 사례를 가르쳐주면서 좋은 선조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들이 자라서 이런 사고가 전 세계에 퍼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앨런 쿠퍼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러분이 위험을 이해하고, 변곡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의지로 동료들과 함께 꾸준히 이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후손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단지 또 다른 억만장자를 탄생시키는 제품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자랑스럽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제품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테크 업계의 성공 기준을 돈이 아니라 세상을 더 공평한 곳으로 만드는 것으로 바꿔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해낼 힘, 리더십, 의지,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선조가 될 수 있습니다.

앨런 쿠퍼의 이야기는 사회적 인터랙션 디자인의 시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 만들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해 단지 지금, 여기, 우리 세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세계, 미래 세대까지 고려 대상에 넣어서 디자인해야 하고, 내가 하는 일, 디자인하고 만드는 제품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항상 고민하면서 디자인해야 한다.

 

이는 디자이너는 물론, 제품 혹은 서비스를 만드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기존 자원을 사용해서 제품을 만들고 버리는 선형 경제에 자원의 순환과 지속가능성까지 따지는 단계를 더해 순환경제 혹은 세계적인 디자인 컨설팅 에이전시 IDEO의 순환 디자인(Circular Design)과도 맞닿아 있다.

 

* 관련 영상: <Tim Brown: Design & the circular economy – Circular Design Guide> ©Ellen MacArthur Foundation

 

앨런 쿠퍼 세션이 인터랙션 디자인 커뮤니티가 현재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어디로 가고 싶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키노트라 가장 먼저 소개했다. 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로 유명한 하라 켄야는 어떤 이야기를 가져왔을까. 앨런 쿠퍼의 연설과는 분위기가 또 다르다. 그럼 지금부터 그의 키노트로 들어가 보자.

(이후 내용은 최종 리포트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랙션 18, 디자인으로 연결하다]

 

우리 일상 속속들이 스며있는 '디자인'에 대한 철학과 이야기들이 궁금하다면 이 리포트를 주목해주세요. 현대에 가장 대두되는 디자인 철학과 이 분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