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검사의 추억

초등학교 5학년 때 치렀던 IQ 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언어영역 문제에서 나는 아마 지금 봐도 모를 희귀한 단어들의 뜻을 정말 아무 근거 없이 거의 찍었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언어영역에서 유난히 높은 점수를 받았고 담임 선생님은 부모님 보시라고 따로 메모도 해주셨다.

 

어쩌다 보니 나는 10대와 20대에 언어를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게 됐고 곧잘 했는데, 가끔 궁금하다. 그건 정말 내 언어지능이 뛰어나서였을까, 아니면 그때 점수가 높게 나왔으니 언어지능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지능과 공부머리

지능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리 명쾌하지 않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머리'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만큼 노력도 많이 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나도 더 많이 노력해야겠노라고 다짐하는가 하면 그 다짐을 지키지 못 했을 때는 죄책감도 느낄 만큼 노력의 힘을 믿는다. 그러다가 '역시 나는 안 된다'며 능력의 근본적인 한계를 탓하기도 한다.


'머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선생을 붙여도, 아무리 잠을 줄여가며 노력해도 넘지 못할 선 같은 게 있는 걸까? 공부 잘하는 애들이 노력도 많이 하긴 하지만 사실은 머리가 좋아서 공부 방법이나 자기관리 방법을 잘 알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공부머리가 없는 건 엄마 아빠 탓일까? 아니면 엄마 말대로 '애가 머리는 있는데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걸까?

 

스스로의 지능을 낮다고 여기든 높다고 여기든 이런 의문들에 답하기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아래 내용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각자 잠시 생각해보자.

- 지능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라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 지능은 태어난 그 수준 그대로 고정된 것은 아니므로 노력하면 좋아진다.
- 배우고 익혀서 아는 게 많아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능이 더 높아지는 건 아니다.
- 타고난 지능이 높든 낮든 언제든 상당 부분 바뀔 수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태어날 때 이미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평생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성과를 제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본바탕, 즉 타고난 능력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교육의 목적 역시 능력을 계발하는 데 있기보다는 단지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는 데 있었다.

인간의 능력과 운명을 단정 지으려 드는 궤변인가? 아니면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은가?

지능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명쾌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지능(intelligence)'이란 과연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무형의 능력을 규정하기 위해 수많은 논의를 펼쳐왔고, 지능이란 무언가를 배우는 능력 (ability to learn), 즉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고 습득해서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지적 활동의 능력이라는 데 합의한다. 정확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간의 두뇌는 신비로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 같은 활동을 하고, 그 능력을 일컬어 지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보이는 지능의 수준을 어떻게 잴 수 있을까. 우리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능의 측정​

인간의 지능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18세기 말, 19세 초부터 있었다. 영국의 통계학자 골튼(Francis Galton)은 지능이 유전된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반사작용, 근육 세기, 머리 크기 등 신체적 특징과 지능의 연관성을 찾으려 했으나 연구는 (당연히)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프랑스의 심리학자 비네(Alfred Binet)는 앙히(Victor Henri), 시몽(Théodore Simon)과 함께 1905년에 언어 구사능력에 초점을 둔 검사를 개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보편화된 지능 측정의 수단, IQ 검사의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재미있는 점은 비네-시몽 검사가 원래는 지적 능력이 저조한 '아픈' 아이들을 가려내고 학교로부터 격리시키려는 목적으로 개발이 의뢰됐다는 점이다. 당시 교사의 학생 평가와 검사 결과가 일치하는 정도가 높았기 때문에 그 적정성을 인정받았고, 이후 수정을 거쳐 개인의 지능을 수치화하는 지금의 IQ 검사로 발전했다.

IQ의 한계

그러나 몇 시간 간의 문제풀이 결과를 바탕으로 지능을 수치화한 지수, IQ는 그 개념 자체에 이미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100 근처를 오가는 IQ의 '숫자'는 실제 연령(chronological age) 대비 정신연령(mental age)으로 도출한다. 예컨대 10세의 어린이가 같은 연령의 평균만큼 문제를 맞히면 100, 그보다 못 하면 100 미만, 평균을 넘어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 수준의 능력을 발휘할수록 100보다 높은 IQ를 받는다. 다시 말하면, IQ는 같은 연령의 다른 이들과 비교한 상대적 지적 능력을 수치화한 것이다.

 

IQ의 정의에 따라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4세 어린이가 6세 수준의 문제를 맞혔다면? 이 어린이의 IQ는 (정신연령 6) / (실제 연령 4) * 100 = 150, 즉 '천재' 되시겠다. 같은 계산식에 거꾸로 대입해보면 IQ 검사에서 75를 받은 8세 어린이의 정신연령도 6세가 된다. IQ의 개념대로라면 정신연령이 똑같이 6세인 IQ 150짜리 4세 어린이와 IQ 75짜리 8세 어린이의 지적 능력이 같다는 말인데.. 유치원을 시작한 네 살 짜리와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짜리가 정보를 이해하고 습득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정말 비슷할까?

 

더 큰 문제는 IQ 검사라는 수단이 정말 그런 능력을 측정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기억 속에 아스라한 IQ 검사의 문제들을 떠올려보자. 단어 간의 유추를 완성하고, 수열에서 다음에 나올 숫자를 알며, 블록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합치고 회전할 수 있다면 그건 그 문제들을 푸는 데 관련된 지식이나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지, 어떤 정신적 과정을 거쳐서 '배우고 있는지'를 설명하진 않는다. 우리가 IQ 검사를 치르거나 치르고 나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느껴본 적이 없듯이 (나는 그때 찍은 단어들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얼마나 빨리, 효율적으로 활용해 '성과'를 내는지를 측정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시험하는 내용 역시 문제다. 미국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한 지능검사에는 'envelope'이라는 단어의 뜻을 묻거나 뉴욕-시카고 간 거리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들의 답을 아는 것이 '똑똑함'의 척도가 된다고 누가 정한 걸까? 그 기준은 뭘까? 기준은 없다!

특정 연령에 알고 있거나 풀 수 있어야 하는 내용은 출제자가 그 나름의 고심 끝에 정했을 뿐이지 지적 능력의 수준을 보여주는 보편적인 척도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특히 IQ 검사는 유럽과 미국에서 그 지역의 교육 시스템에 준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지식과 능력, 가치를 중시하는 타 문화권에서는 왜곡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문제도 있다. 심지어 같은 미국이라 하더라도 나고 자란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뉴욕이나 시카고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지적 능력이 남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처럼 IQ라는 개념과 그 측정 방식은 단편적이고 임의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또 IQ 검사의 원래 목적이 학교 성취도(school performance) 측정에 있었기 때문에 특정 문화권에서 강조되는 특정 능력으로 지능의 전부를 설명하기도 억지스럽다. 우리가 지능을 측정하고 파악하려는 이유가 학교 성적이든 대학 입학이든 성공적인 인생을 설계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인지능력의 형태로 계량화할 수 없는 다른 지능들도 파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가드너(Howard Gardner)는 1983년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가드너는 IQ 검사가 논리력과 언어능력에 치중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언어, 음악, 수학, 공간, 운동, 자기이해, 대인관계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서로 다른 종류의 지능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다중지능이론은 똑똑하거나 그렇지 않은 학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누구나 다른 지능이 다른 정도로 발달했을 뿐이라는 기분 좋은 메시지를 전했고, 미국 교육계의 환영을 받았다. 많은 학교들이 다중지능이론에 맞춰 교과과정을 개편하고 수업방식을 바꿨다. 지능 별로 어울리는 다양한 학습 방식(learning style)도 논의되었다. 많은 언론매체가 다중지능이론을 칭송했고 한국의 EBS도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이를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이 희망찬 다중지능이론은 정작 학계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우선 가드너의 다중지능은 사실 '지능'이라기보다는 '능력'이나 '적성'에 가까운 개념이다. 또 여러 지능이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뛰어난 영역이 다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 지능들 간의 상관성이 높아서 하나를 잘 하면 다른 것도 잘 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가드너가 나눈 지능의 종류 역시 IQ 검사 항목만큼 자의적이라서 다른 누군가가 분류법을 바꿔서 비슷한 주장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여러 학교의 적극적인 도입에도 불구하고 다중지능이론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 교육 효과가 좋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실증 연구와 신경과학 연구 모두 다중지능이론에는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가드너 역시 자신의 이론에 경험적 근거가 불충분함을 인정했다.

무엇을 개발할 것인가

가드너 스스로도 인정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다중지능이론은 지능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열이면 열 모두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배우는 아이들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해오던 교육자들은 이제 여러 영역에 걸친 아이들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기존의 교육법을 성찰한다.

앞서 언급한 일곱 가지 지능(언어, 음악, 수학, 공간, 운동, 자기이해, 대인관계)에 더해 포함하려 한 실존, 자연, 영성, 윤리지능은 좀 황당할 정도지만 그간 교육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중요한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공을 세웠다.

우리가 배우고 알고 적용하는 정신작용은 거의 대부분이 아직 신비의 영역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고도의 정신작용을 가능케 하는 능력, 지능을 파악하고 측정하려는 노력에는 여전히 많은 오해와 오류가 있다. 그러나 가드너의 말대로 '감기 걸린 사람의 체온을 자꾸 잰다고 감기가 낫지 않듯'이 이런 노력의 목표는 평가와 예측 (어쩌면 단정 짓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상대를 잘 알고 무엇을 어떻게 개발할지 구상하고 돕는 데 있을 것이다.

 
그때 어쩌다 높게 나온 언어 점수와 선생님의 메모 덕에 재미있는 인생의 주제를 하나 갖게 되어 기쁘지만 가끔은 그 메모가 아니었다면 다른 걸 더 잘하게 되진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느낀다. 지능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가장 먼저 규명해야 할 것은 결국 이런 문제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