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마주한 낯선 개념

Editor’s Comment

콘텐츠를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은 배경과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야기, 심리 변화,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했죠. 하지만 인터랙티브 미디어가 그 판도를 서서히 바꾸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왜 선댄스로 가는가 - 선댄스 영화제 2018' 두 번째 미리보기는 미디어의 변화가 영화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입니다. 콘텐츠 제작 철학이 현재 어디까지 진화하고 있는지 황수진 저자가 '월드 빌더'와 나눈 대화 일부를 소개합니다.

전문이 실린 리포트 및 김종관 감독, 윤가은 감독과 황수진 저자와의 대담 상품은 3월 8일(목) 오후 5시까지 선착순으로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상단 이미지 ©Kyle Glenn
일요일 오전, 나는 메인 스트릿(Main Street)에 있었다. <화이트 래빗(White Rabbit)>*의 주연인 한국계 미국인 배우 비비안 방(Vivian Bang)을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미 약속시간이 지났지만, 퍼블리시스트**는 그녀가 15분 정도 더 늦을 것 같다고 연락해왔다. 만남이 더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이라도 다른 흥미로운 정보를 찾아보고자, 인터뷰 장소 맞은편에 위치한 팝업 스토어 델 덴(The Dell Den)에 들어섰다.

* 데릴 윈(Daryl Wein) 감독, 비비안 방 주연의 코미디 영화. 2018년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Best of Next) 부문 후보
** 개인 또는 기업의 홍보와 언론 대응 직책

The Dell Den의 전경 &#9426;Dell

델은 선댄스 영화제의 공식 후원사다. 이 팝업 스토어에 들른 영화제 참가자들은 공짜 커피나 핫초코 음료를 제공받으며, 엔터테인먼트 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패널 프로그램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엔 <인공지능과 결합된 미래의 노동에 대한 상상(Imagining Work in an A.I. Integrated Future)>이라는 발표가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잠시 뒤 이 행사의 패널 중 한 사람인 알렉스 맥도웰(Alex McDowell)이 '월드 빌딩(world-building)'*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를 비롯한 여러 할리우드 영화의 미술감독이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 소속 월드 빌딩 연구소(World Building Institute)의 기획자다.

*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 또는 허구로 구축된 세계를 뜻한다. 주로 개인적 즐거움이나 정신 운동 또는 소설, 롤 플레잉 게임 등의 창조적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곧 비비안 측으로부터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떠야만 했다.

월드 빌더를 만나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황급히 돌아갔을 때는, 예상했던 대로 프로그램이 끝난 뒤였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대학의 월드 빌딩 미디어 연구실(World Building Media Lab)에서 맥도웰과 같이 일하는 '월드 빌더(World Builder)', 트리샤 윌리엄스(Trisha Williams)와 조셉 엉거(Joseph Unger)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게임 기획자*이자 인터랙티브 미디어** 분야의 컨설턴트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선댄스 재단에서 지원하는 뉴 프런티어 아티스트 레지던시(New Frontier Artist Residency) 프로그램에도 리더로서 참여했다.

* 게임의 전반적 내용(세계관, 캐릭터, 게임 안에서의 사건과 서사 등)을 만들어내는 직책
** 게임이나 아동용 교육 소프트웨어와 같이 이용자와 전달자 사이에 정보가 양방향으로 전달되며 상호작용하는 모든 종류의 매체를 포괄적으로 가리는 단어

왼쪽이 트리샤 윌리엄스, 오른쪽이 조셉 엉거 &#9426;USC

황수진(이하 황): '월드 빌더'는 처음 만나보네요. 월드 빌딩은 오늘 패널 발표에서 처음 접했어요.

 

트리샤 윌리엄스(이하 윌리엄스): 월드 빌딩은 게임 업계에선 낯설지 않아요. 영화 제작 단계에서 월드 빌딩을 고려하는 일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조셉 엉거(이하 엉거): 특히 최근 5년 사이에 인기가 늘었어요. 예전엔 영화나 게임 같은 해당 업계 종사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지만, 맥도웰이 USC에 월드 빌딩 연구소를 세우면서 하나의 운동으로 확장되었어요.

 

월드 빌딩을 통해서 세계를 먼저 조직해놓으면, 그 속에 있는 자산(assets)을 활용해 영화, 만화, 게임, 증강현실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시킬 수 있어요. 세계관 자체가 독자적 미디어인 것이죠.

 

예를 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그가 세계관을 구성한 뒤에 시나리오가 나왔어요. 그리고 이 영화의 세계관에 기반해서 나온 특허가 100여 개입니다. 영화 <어벤저스>로 대표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도 디즈니/마블 스튜디오가 월드 빌딩을 사용한 결과물이에요.
 

* 관련 영상 <World Building the Marvel Way> ©Faceit

 

윌리엄스: 그래서 월드 빌딩 개념을 갖고 콘텐츠 제작에 착수하면, 스토리텔링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과 공정이 필요해요.

게임에서 영화로
배경에서 독립된 존재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기예(技藝), 테크네의 귀환

황: 어떤 새로운 방식과 공정이 필요할까요?

 

엉거: 월드 빌딩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에요. 영화를 제작할 때는, 일반적으로 감독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전개시키도록 만들죠. 반면 월드 빌딩에서는 상호성(interactivity)이 굉장히 중요해요.

 

영화와 월드 빌딩이 결합한다면, 이것은 영화와 관객의 상호 교류를 포함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분야의 종사자들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죠. 또,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과 접점을 찾을 수도 있어요.

 

황: 인공지능이 어떻게 월드 빌딩과 이어지나요?

 

윌리엄스: 월드 빌딩과 인공지능이 서로의 영역을 공유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어요. 이번에 선댄스 재단의 후원 아래 미래의 로스앤젤레스를 설계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그 일환으로 그레이스 리(Grace Lee)*가 <케이타운 92(K-TOWN '92)>**를 제작했어요.

* 한국계 미국인 감독. 자신과 이름이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의 삶을 추적한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The Grace Lee Project)> 등을 제작했다.

** 1992년 로스앤젤레스 봉기 당시 코리아타운에서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영상 1,700여 개가 통합된 형태의 인터랙티브 콘텐츠

&#60;케이타운 92&#62; 웹사이트 &#9426;Grace Lee

우리는 단순히 "미래의 로스앤젤레스는 이러이러할 것이다"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 미래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일방적인 인터뷰 형식을 넘어서서 상호 교류하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삶에 대해 현실의 인류가 축적한 데이터를 재해석하고, 미래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가상의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보고자 인공지능을 활용하려 해요. 유니티 테크놀로지(Unity Technologies)*와 델이 특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어요.

* 게임 환경 구현에 필요한 시청각적 요소들의 제작과 움직임 계산 등을 도와주는 개발자용 소프트웨어인 게임 엔진 유니티를 만든 회사. 유니티는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엔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예술에서 사회공학으로

엉거: 보상체계도 함께 고민해야 하죠. 영화 화면 안에서 배경으로 지나가는 의자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죠. 현재 체계에서는, 의자를 만든 사람은 대부분 창작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해요. 하지만 애초부터 협업에 기반한 월드 빌딩에서는 이 의자와 그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논의할 수 있어요.

 

이런 포괄적인 경제체제도 월드 빌딩 관련 연구의 주제예요. 그래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카우프만 재단(Ewing Marion Kauffman Foundation)*이 이 프로젝트에 후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 제약회사 경영자인 유잉 카우프만이 설립한 재단. 창업가 정신 및 아동교육이 중점사업이다.

 

USC 이외에 네브래스카 주립대 등 타 대학도 본격적으로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어요. 이렇게 연구가 심화되면 시, 주, 국가 단위까지 월드 빌딩을 적용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영화 촬영장을 상상해보세요. 촬영이 끝나면 세트장은 부서져버리죠.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 그 세계가
자신만의 생명을 갖고
지속하길 원해요

황: 월드 빌더들의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윌리엄스: 기술은 이미 갖춰졌어요. 언제나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죠.

 

이렇게 월드 빌딩에 관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월드 빌더들은 가상의 세계가 현실이 되며 동시에 현실이 가상에 스며드는 세계를 구축하려는 야심 찬 기획의 동반자들을 찾아 이 곳에 왔다. 우리는 이렇게 선댄스 영화제에서 과거를 연구하고, 현재를 공유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스토리텔러들을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곳을 바라볼 수밖에, 이 곳에 올 수밖에 없다.

* 최종 리포트에서는 '월드 빌딩'을 포함하여 영화 산업의 새로운 트렌드를 예측할 수 있는 내용들을 더욱 자세히 기술할 예정입니다. 영화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의 김종관 감독, 영화 <콩나물>,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과의 대담 행사도 각각 준비되어 있으니 리포트에 담기지 않는 생생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해주세요. [자세히 보기]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왜 선댄스로 가는가 - 선댄스 영화제 2018]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국 영화 산업 현장을 2010년부터 누벼온 영화진흥위원회의 미국사무소장인 황수진 저자가 선댄스 영화제 2018 현장에 직접 다녀왔습니다.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2018년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플랫폼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작은 독립 영화제가 산업을 이끄는 힘을 갖추게 되었는지 현장에서 느낀 힘을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