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일차: 호텔에서
들려오는 스피커 소리에 깹니다. 휴대폰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하니 6시 새벽입니다. 노래 같기도, 주문 같기도 하네요. 정체를 파악할 새도 없이 다시 잠에 빠집니다. 창을 지나 침대까지 도착한 햇살이 발등을 간지럽힙니다. 눈을 뜹니다. 10시 30분. 여기서 더 자면 손해입니다. 늘어지게 자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나는 여행을 왔다고. 분연히 침대를 박차고 직립을 했습니다.
화장실에 갔습니다. 온수/냉수가 수도꼭지가 보입니다. 온수 꼭지를 열었습니다.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떨어져요. 5분을 틀었어요. 손을 대봤더니 여전히 차갑습니다. 피가 몸에 돌면서 잠이 다 깼어요. 샴푸를 챙겨오지 않았습니다. 명색이 호텔인데 싸구려 샴푸라도 놓겠지 싶었죠.
가로 4cm 세로 3cm, 두께 1cm 정도 되는 비누 하나가 포장된 채 놓였더군요. 안경을 쓰고 1mm 제곱 크기의 글자들을 들여다봤어요. 가격은 3루피(54원). '음. 딴 거 없이 염기성 하나로만 똘똘 뭉쳐 친 놈이로구나?'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준비성이라곤 10원짜리도 안 되는 나의 잘못인 것입니다.
참회의 마음으로 옷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떨어지는 물에 달려들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비누를 박박 문댔죠. 참 추웠습니다. 온 몸에 돌기가 솟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이때 나는 '물에 녹 냄새가 안 나서 참 다행이야'란 생각을 했어요. 인도 여행지에서의 현지화란 늘 이렇듯 외부적 충격에 의해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이뤄집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내 몸집만 한 대형 타월이 두 장 놓였더군요. 이건 확실히 좋았어요. 커다란 샤워 타월은 늘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수건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이용해 전신의 물기를 효과적으로 닦아낼 것인가'란 고민을 할 자리를 한 터럭도 용납하지 않죠. 풍요(혹은 충분함, 큼)란 빈곤(혹은 결핍, 작음)보다 명백하게 상위인 가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늘 3년 전 압구정동 스타벅스에서 만났던 남자 화장실 소변기를 생각합니다. 압구정역 스타벅스 남자화장실은 1~2평 남짓합니다. 소변기는 한 개, 대변기도 한 개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에서 커피를 팔려면 테이블 개수를 하나라도 늘려야 하니까 화장실을 작게 만드는 건 당연하죠.
내가 감동했던 건 웬만한 성인 남성 몸통을 품고도 남을만한 초대형 소변기였어요. 이 앞에 서 있자면, - '후후 어디든 쌀 테면 싸보라고'는 너무 심술 맞은 청년 같고 - '허허 자네 왔는가? 한번 시원하게 어디든 누고 가시게나' 정도의 할아버지 음성이 들리죠. 어린 시절 할아버지 시골집에 놀러 가서 논밭에 아무렇게나 휘갈길 때의 해방감이랄까 자유랄까. 그런 방일함을 스타벅스 소변기는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카페에 동석한 여성에게 "야야 글쎄 소변기 크기가 이만하다니까?" 하면서 양손을 벌리고 그 크기를 흉내 냈죠. 그 여성은 날 항문기나 유아기를 잘못 보낸 벌레 보듯이 봤을 겁니다. 3년 전 일입니다. 이때보다 성숙한 나는 이제 '여성에게 남성용 변기 이야기는 할 말이 못 된다'는 것쯤은 압니다.
그나저나 역시 스타벅스는 스타벅스입니다. 압구정 금싸라기 땅에 떡 하니 가게를 낼 만한 자격이 충분한 회사죠. 제일 큰 소변기를 설치해 1평 되는 화장실에서까지 감동하게 만들다니 말이죠.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 인근의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은 압구정 스타벅스 남성용 소변기이자, 호텔의 커다란 샤워 타월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덩이에 조성된 수십개의 석굴과 벽화, 그 안에 새겨진 셀 수 없는 조각들은, 확실합니다. '왔는가, 그렇다면 보아라' 석굴암이 30개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거대하면서 동시에 세밀한 돌덩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뚜렷하고 압도적으로 그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놉니다. 돌부처가 던지는 감동의 돌 직구는 맞아도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캐처 박스(catcher's box)까지만 가면 되는 거죠.
로션은 안 가져왔습니다. 대신 한국에서 사온 미샤 남성용 선크림을 가져왔네요. 인도 마트에서 산 로레알 왁스를 가방에서 꺼내 머리에 발랐어요. 그러자 '아니 왜 샴푸를, 샴푸를 말이야. 왜 샴푸를 안 가져온 거지?' 생각이 솟구쳤고, 나는 실없는 웃음으로 애써 그 생각을 억눌렀습니다.
고무줄 보세 면바지와 홀리스터 티셔츠를 입고 식당에 갔습니다. 아침메뉴에 빵과 계란 후라이와 우유가 적힌 메뉴를 하나하나 한참을 찾고 있는데, 종업원이 한심하단 얼굴로 'western full'을 가리키더군요. 버터와 잼을 곁들인 토스트, 계란, 쥬스, 커피를 하나로 묶은 세트가 맨 위에 쓰여 있었습니다. '그만하고 제발 그걸로 해줘'
음식을 숙소 방갈로 앞에 설치된 탁자로 배달시켰습니다. 풀과 나무, 새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포크를 들었습니다. 빵 씹는 소리와 주스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에 집중하며 천천히, 그리고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이제 가면 됩니다. 하루종일 엘로라만 보면 됩니다.
엘로라, 34개의 동굴들
호텔에서 나올 때 "엘로라 가려면 어떻게 해요"라고 물어본 게 머쓱해졌을 정도로, 호텔 바로 옆에 엘로라 가는 입구가 있었습니다. 명승지 입장료만큼은 강력한 외국인 차별정책을 유지하는 인도라서, 250루피를 냈습니다. 인도사람에겐 10루피를 받죠. 250루피라고 해봤자 4500원입니다.
두 명의 티벳 승려들이 보였습니다. 이곳에 몽골계통으로 생긴 아시아인이 드물어서인지, 반갑더군요. 순박하고 환한 인상의 스님들이라 마음이 갔습니다. 내가 아는 김대성 형 같이 생겼어요. 가는 길에 합장하자, 티벳에서 왔느냐고 묻더군요. 한국사람인데요? 하니까 자기들이 썼던 손전등을 건네는 겁니다. 동굴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려면 손전등이 필요하다면서요. 휴대폰으로 같이 셀프 카메라를 찍었습니다. 순박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늘 즐겁습니다. 티벳 대성이 형 고마웠어.
이곳 시골 아이들은 너무나 천진무구해서, 이방인을 보기만 하면 말을 걸고 자기와 사진을 찍자 합니다.
토요일인데도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중학생 무리가 소풍을 왔더군요.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면 어느 틈엔가 그 앞으로 수십명이 몰렸습니다. 12억 인구의 인도는 35세 이하 젊은 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5%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입니다.
어딜 가나 아기를 품은 인도 여인들을 볼 수 있고, 새, 돼지, 개, 소의 새끼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요. 꼬마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다가, 어느 순간 '조금만 손을 대도 얘네들의 생명력이 터져버릴 것 같아'는 생각이 들면서 약한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그 뒤론 아이들의 관심에 응하는 둥 마는 둥 했어요. 
동굴이 보입니다. 총 34개의 동굴이 있는데, 최남단에 있는 동굴부터 순서대로 순번이 매겨 있어요. 입장하는 길에 놓인 16번 동굴이 기준입니다. 불교 동굴군은 12번까지, 힌두교 동굴은 13번부터 29번까지. 자이나교 동굴은 34번까지. 시간은 많으니 하루 종일 느긋하게 모든 동굴을 가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머리 복잡하니까, 1번부터 시작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아는 게 없어서 보이질 않습니다.
하루하루 석 자 코 간수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한국에서 친구가 선물해준 '론리플래닛 인도'를 펼쳤습니다. 이게 알려주는 만큼만 보면 되는 거죠.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망치와 끌을 들고 평생 돌을 깎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여자를 만나 애도 낳았죠. 아들은 날마다 망치와 끌을 들고 집을 나서는 그를 봤습니다. "아빠 어디가?"라는 말에 이 남자는 뭐라고 답했을까요?
2km 길이의 거대한 돌은 500년간 조금씩 깎여나가다 결국 예술이 됐습니다. 남자의 아들도, 아들의 아들도, 아들의 아들의 아들도 돌을 깎았겠죠. 아들들이 무엇을 보고 들었기에 아빠처럼 망치와 끌을 들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습니다.
말이 없는 석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할 말을 잃습니다. 안에서 맴도는 언어들은 저 밑으로 가라앉고, 텅 빈 침묵 안에서 시선만이 그 초점을 조금씩 수정해갔습니다. 얼굴부터 어깨로, 어깨에서 손으로, 손에서 밑으로. 여전히 부처는 말이 없습니다.
서늘한 동굴 안에서 땀을 식히길 여러 번, 어느덧 내 마음도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인간이 수 세대에 걸쳐 500년간 끌과 망치로 빚었다는, 순정한 땀이 서린 거대한 유적 곳곳에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곡진한 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일꾼이기 이전에 수도자였던 이들에게 엘로라 석굴은 세계 전부이자, 삶 자체였을 겁니다. 삶을 송두리째 종교라는 것에 내 던진 겁니다. 이 사람들은 노동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공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나는 '공을 들이는' 행위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사전적 정의는 '정성과 노력을 많이 들이다'입니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가치나 대상을 위해, 정성스런 마음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겁니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어렸을 적 종이학 천 마리 접기인 거죠. 인도인들이 500년 동안 매일 돌을 깎는 일이나 조선시대 어머니들이 매일 밤 그릇에 물 받아놓고 아들의 무병장수와 입신양명을 삼신할매께 손이 닳도록 비는 일이나 내겐 모두 종이학 천 마리 접기의 확장판입니다.
우리 엄마가 매주 절간에 가서 하는 108배, 시골 사는 할아버지가 내 이름이 달린 기사를 오려 스크랩하는 일, 기자가 되겠다고 회계사를 그만둔 내 친구가 매일 방구석에서 신문을 읽고 공부하는 일, 자기 전마다 애인의 건강과 안위를 비는 일, 꽃을 피우기 위해 화분에 물을 주는 일, 심지어 내 친구가 일본 여자 만나겠다고 하루에 20분씩 일어 테이프 듣는 일 따위가 모두 공을 들이는 겁니다.
이런 행위는 별것 아닌 우리를 조금은 특별하게 만듭니다. 어쩔 수 없이 속(俗)된 내 안에 성(聖)을 세우는 일이고, 무의미로 가득한 일상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입니다. 이 행위는 신(神)적이기도 하고, 시(詩)적이기도 합니다. 순박하고 미련해 보일수록 나는 정이 갑니다. 제법 감동스러운 구석이 있죠.
일전에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이 설날 즈음에 트위터에다 쓴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청 욕먹을 이야기. 장남이 교회 다니거나 미국에 살면, 다른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사를 맡는다. 그런데 그 집 아이들이 대개 공부를 잘한다.' 그의 예상대로 역시나 엄청 욕을 먹긴 했어요. '제사 때 술 따르고 절하는 사람들은 제사에 대해 말하지 마라' '가부장적인 말이다' '요즘 시대 누가 제사를 지내느냐' 등등.
나도 잘 모르지겠지만,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제사를 지내는 그 집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제사를 위해 공을 들이는 모습을 봤을 거예요. 그러면 정성스런 마음이 생긴달까, 그런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나도 모르게 몸에 배는 거죠. 어떤 이들의 눈에는 부당하고 비합리적으로 비칠지라도, 제사를 -혹은 그 어떤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찮더라도 그것을 위해 시간과 힘을 정성껏 쏟는 모습은 마음을 울립니다.
내 눈에 공을 들이는 사람은 무언가 비범해 보입니다. 아니, 비범한 인간이 아니면 공을 들일 수 없습니다.
10번 동굴은 불교 동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동굴로 알려졌습니다. 천장 골조가 아치형으로 아늑하게 만들어져 있고, 본존불과 주변 불상들도 세밀히 세공됐죠.
'불교 동굴은 조용하고 묵상적인 반면, 힌두교 동굴군(13~29번 동굴)은 극적이고 열정적이다. -론리 플래닛'
나는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인도에 오기 전에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에 묘사된 차문다 상을 보길 원했어요. 인간과 신,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 묻는 대단한 종교 소설이었는데, 소설에 소개된 '차문다 상'은 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이었거든요. 저마다 말 못할 사연을 지닌 일본인들이 각자의 화두를 갖고 인도 순례 여행을 옵니다. 이들을 안내하는 가이드인 에나미가 바라나시에서 차문다 여신상을 소개하는 대목이 있어요.
그녀는 성모 마리아처럼 청순하지도 우아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의상도 걸치고 있지 않습니다. 거꾸로 추하게 늙었고, 괴로움에 헐떡이며 그걸 견디고 있습니다.
이 치켜올려진, 고통으로 가득 찬 눈을 한번 보세요. 그녀는 인도인과 함께 괴로워합니다. 조각상이 만들어진 건 12세기인데, 그 괴로움은 현재에도 그대로입니다.
유럽의 성모마리아와 다른,
인도의 어머니 차문다입니다."
엘로라에 내가 보길 고대했던 차문다 여신상은 없었습니다. 아니, 수만개의 조각 중에 내가 보지 못했을 수도 있죠. 차문다 여신을 보기 위해서라도 바라나시엔 꼭 한번 가봐야겠어요.
가장 거대한 규모의 힌두교의 16번 카일라사 석굴 사원이 760년 라슈뜨라꾸마 왕조 시대에 크리슈나 1세에 의해 시바 신의 히말라야 거처인 카일라사 산을 상징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여길 만들 때는 사람들이 기세등등 장밋빛 미래에 부풀었나 봐요. 나라도 잘나가고 경제 분위기가 좋았던 거죠.
'힌두교 사원에서 볼 수 있었던 예술적 생동감과 야심만만한 규모는 갖지 못했지만, - (또) 론리플래닛'
5개의 자이나교 동굴들은 소박합니다. 힌두교나 불교 수행자들과 비교하면 소수파로 존재했던 당시 수행자들의 비루한 처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북쪽으로 1km 떨어져 있죠. 중앙의 카일라사 사원과 자이나교 동굴군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있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구릉길을 홀로 고요히 걷고 싶었습니다.
나뭇가지를 지난 바람은 부지런히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실어 날랐습니다. 더불어 내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며 15분간 걸었더니 제법 쓸쓸해졌습니다. 방문객들도 여기까진 오기 귀찮은지, 많지 않았어요.
모든 동굴을 둘러보는 사이 해는 땅 밑으로 몸을 숨겼고, 가져온 1리터짜리 물통은 비었습니다. 엘로라를 나서자 심한 갈증이 일어 바로 앞 노점에서 코코넛 열매를 샀습니다. 허겁지겁 빨대를 꽂아 미친 듯 빨고선 호텔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호텔에서 바라본 엘로라는 까맣게만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