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장래희망이었던 선생님
우리 집에서 딱 두 블록, 3분 만에 도착했다. 대학원 다니면서 매일 같이 지나다니던 이 학교 건물이었을 줄이야. 입구에서 기다리던 채용담당자 크리스틴을 만나서 학교를 둘러보고 수업을 참관하고 질문을 주고받고, 정해진 시간이 되어 예정된 장소로 옮긴 후 소개를 받아 학생들 앞에 섰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의 시점이 임박하고, 한 무리의 새끼 새를 마주한 어미새 같은 심정으로 나는 드디어 지난 2주간 준비해 온 시범수업을 시작했다.
바로 오늘 오후 있었던 내 생애 가장 특이한 경험 중 하나. 우리 집 코앞에 있는 한 학교에서 한국어 교사 채용의 마지막 관문인 시범수업을 했다. 교사라… 초등학교 6학년이었나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였던 그때 '초등학교 선생님 (고학년)'이라고 장래희망을 적어낸 기억이 난다.
대입 때 택도 없게 떨어진 사범대 특차 이후로 멀고 먼 길을 돌아 어린 시절 장래희망이었던 선생님 자리에 지원하다니. 교육 공부를 하기로 하고도 내가 여태 해오고 또 잘 하는 건 언어인데 이게 맞는 건가 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 이역만리 미국 뉴욕, 그것도 할렘에서 내가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모국어, 한국어 교사 자리. 참 인생이란 놀랍고도 실없는 농담 같을 때가 있다.
데모크라시 프렙을 소개합니다
내 개인적인 정황이야 그렇다 치고, 이 할렘의 고등학생들은 왜 하고많은 외국어 중에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걸까?
미국에서 흔히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스페인어를 두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 학교는 바로 데모크라시 프렙 퍼블릭 스쿨(Democracy Prep Public Schools)이라는 길고 생소한 이름의 학교이다. 프렙 스쿨(Prep School)이란 University(College)-Preparatory School, 즉 대학 예비학교를 간편하게 줄여 부르는 말로 우리나라 중3에 해당하는 9학년부터 12학년이 다니는 사실상 고등학교와 같은 개념이다.
데모크라시 프렙은 정부 예산으로 민간이 운영하는 (Publicly Funded, Privately Managed) 차터 스쿨(Charter School)이다. 각종 규제와 행정에 매여 전통적인 교육방식을 벗어나기 힘든 공립학교와 우수한 교육을 대가로 비싼 등록금과 고귀한 우편번호를 요하는 사립학교의 대안으로 미국에서는 1991년 미네소타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주마다 운영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대안교육의 성공사례로 자리 잡으면서 2014-2015년 기준 미국 전국에 6700곳에 이르는 차터 스쿨에 290만 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차터 스쿨은 교육부 관할이 아닌 민간의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혁신적인 학교 운영 및 교육 과정을 실현하면서 공립학교가 고질적으로 앓아온 교육의 질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정부 예산으로 권세 있는 일부가 아닌 누구나 무상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땐가 순 한글 이름을 내걸고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던 대안학교, 혹은 최근의 자립형 사립학교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터, 즉 인가서를 받아 설립되고 운영되는 차터 스쿨은 평가 결과에 따라 폐교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학교들은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한다. 데모크라시 프렙만 해도 독창적인 과정과 제도를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한국어 교육'이다. 창립자인 세스 앤드류(Seth Andrew)는 지금의 부인(Lana Zak 이라고 ABC 기자이기도 하다)과 결혼하기 전, 어머니의 모국인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를 하고 있던 그녀를 만나러 한국을 방문했다가 본인도 중학교에서 1년 정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때 깊이 느낀 것이 바로 한국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에 투자하고 선생님을 존경하는 헌신적인 가치관에 감화된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2006년에 첫 데모크라시 프렙 중학교를 개설했다. 그리고 언어가 문화적 가치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2009년부터 한국어를 모든 데모크라시 프렙 고등학생의 필수과목으로 도입했다. 방과 후 활동에서도 다양한 한국 문화 체험을 통해 배려, 존중, 정성, 겸손, 조화, 또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뽐낸 '흥'과 같은 한국의 정신을 전수하고 있다.
ⓒ오영주
지역사회를 일으키는 차터 스쿨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데모크라시 프렙의 또 다른 고유한 과정으로 시민교육(Civic Education)이 있다.
단순히 대학 입학을 넘어서 투표권을 행사하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행동임을 강조하고 어린 학생들부터 교육한다.
2012년 대통령 선거철에는 당시 입에 짝짝 붙는 멜로디와 귀염성 넘치는 가사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Call me maybe'라는 가요를 개사해서 'Vote for somebody'라는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는데 (Vote for Obama, or vote for Romney라고 오바마를 앞에 넣어주는 센스) 꼬마들이 율동과 함께 꼭 투표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라며 가끔씩 꽤 어려워지는 가사까지 열심히 노래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전율이 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물론 학생들은 투표권이 없지만 학교의 시민교육을 받은 학부모의 투표율이 처음 개교한 2006년의 9%에서 2013년의 78%까지 올랐다고 하니 무지와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왔을 이 지역사회에 불러온, 실로 가시적인 성과다. 학생들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I Can't Vote… But You Can"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워싱턴 DC의 거리를 다니며 투표권 행사를 촉구하는 활동도 한다.
차터 스쿨은 특히 할렘과 같이 사회경제적 약자가 모인 지역사회에서 쇠망한 공립학교들로 인해 무너진 교육을 바로 세우고 지역사회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뉴욕시의 흑인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의 학업능력이 제 학년 수준에 못 미치고, 데모크라시 프렙만 해도 재학생 대다수가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전무한 한부모가정 출신이다. 자원도 동기도 롤모델도 없는 이들은 부모의 고생스러운 직업과 적은 소득, 혹은 쉽고 나쁜 유혹의 악순환의 고리에 물려있다.
그러나 데모크라시 프렙 같은 차터스쿨들은 이 고리를 끊고 교육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비효율을 척결한 린(Lean) 경영으로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그 돈으로 우수한 교사진 및 운영진을 선발하거나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운영하는 데 투자한다. 특히 데모크라시 프렙은 모금활동을 통해 외부 기금을 다량 유치하는 타 차터 스쿨들과는 달리 특수 목적을 제외한 학교 운영비용을 모두 정부 예산으로 해결하여 공적기금만으로도 양질의 교육을 실현할 수 있다는 모델을 제시한다. 오직 '양질의 교육'을 목표로 최대한의 자원이 집중된 결과는 학생들의 가시적인 성과로 확인된다.
4년간의 고등학교 졸업 시점에 대학생활에서의 성공 예측의 척도가 되는 것으로 밝혀진 영어 및 수학 자격시험의 기준점 이상을 획득한 학생의 비중. 2013년 뉴욕주 자격시험(Regents, 주요 과목의 표준화 자격시험으로 고교 졸업 요건)에서 DPPS로 표기된 데모크라시 프렙의 활약이 뉴욕주 주요 시 및 뉴욕시 평균을 훨씬 웃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DEMOCRACY PREP PUBLIC SCHOOLS
Work hard. Go to College. Change the World.
실제 가본 데모크라시 프렙의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정말 야심 차게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Work hard. Go to College. Change the World.'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모토 뒤에 가장 근본이 되는 건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높은 기대수준.
학생들은 Student가 아닌 Scholar라고 불리며, 교실에는 숫자 대신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미국 유수의 대학교 이름이 걸려있다 (한국 대학들도 있다). 12학년 학생들이 적어낸 목표 학교와 현재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시물들도 눈에 띈다.
처음에는 너무 학벌 중심의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데모크라시 프렙이 최초로 배출한 졸업생 전원이 최소 10곳의 4년제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니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너마저도 '갈 수 있다'는 신념에 가까운 높은 기대치가 이렇게 괄목할 만한 결과를 낳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 곧 '믿게' 되었다.
ⓒ오영주
그러나 이렇게 희망 가득한 차터 스쿨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누구나 갈 수 있지는 않다. 데모크라시 프렙만 해도 2006년에 중학교 한 곳으로 시작해서 올해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17곳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이 '학교'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운동장 딸린 학교 건물 전체를 쓰는 그런 학교가 아니고 건물의 일부, 보통 한두 개 층을 임차해서 좁은 공간을 최대한 쥐어짜서 쓰는 수준이기 때문에 양질의 교육자원이라는 것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열린 학교를 지향하는 차터 스쿨들은 파워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대적인 추첨을 통해 학생을 선발한다. 다큐멘터리 'The Lottery'는 Success Academy Charter School이라는 할렘에서 대표적인 또 다른 차터 스쿨을 중심으로 입학 대상자에 당첨되길 염원하는 가족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교육만이 유일한 돌파구이자 희망인 환경에서 차터 스쿨 입학 당첨은 그야말로 아이와 가족의 인생을 건 '대박'의 꿈인 듯하다.
쓰다 보니 오늘 시범수업 후 이어진 대화에서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을 다 쏟아낸 것 같다. 나중에 좋은 리더가 되려면 현장을 반드시 알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찾아 나선 교직. 자격증 하나 없는 내게 유일한 기회일지 모를, 한국어 교사라는 참으로 특이한 자리.
과연 나는 데모크라시 프렙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잊지 못할 전환점이 다가오길, 희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