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아우랑가바드

이번 설 연휴를 맞아 3박 4일 일정으로 아잔타, 엘로라 석굴이 있는 인도 중부 마하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 갔습니다. 인도에서 혼자 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인도에 온 뒤로 틈날 때마다 짐을 싸고 델리를 떠나고 있어요. 그간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와 남부의 바다 휴양지 고아를 인도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죠.

석양의 타지마할. 타지마할이 휜게 아니라 첨탑(미나레트)이 원래 바깥쪽으로 살짝 기울어져있습니다. 지진 났을 때 소중한 타지마할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밖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도록 설계된 운명의 데스티니.

돈을 버는 족족 쓰고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다시 인도에서 살아보겠습니까. '기회 닿는 대로 뻔질나게 돌아다녀야 한다'고 멋대로 정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인도에 있는 한국 대기업에 다니는 한 아저씨는 "흠. 젊었을 때 이곳저곳 다니면서 돈 쓰는 건 경험도 쌓고 좋은 거죠"라면서 한마디 덧붙이더군요. "허튼 데 돈 쓰는 것보단 낫네요." 허튼 데라는 건 주색(酒色)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니, 부장님. 인도에 허투루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그간 쌓은 내 이미지도 있고 해서 내뱉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 허랑방탕 맹렬히 주색을 탐하면 비로소 급행열차 티켓을 얻을 수 있는 거죠. 목적지는 패가망신입니다.

놀러다니는 건 낭비가 아닌 투자지.
견문을 넓히는 모험을 떠나 볼까.
론리 플래닛을 훑어보다 아잔타 석굴을 본 순간, 나는 고대 불교 유적 탐험을 앞둔 인디아나 존스처럼 굴었습니다.

출발 전날 단숨에 비행기표를 예매했어요. 아잔타 석굴은 한국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강변 절벽에 석굴 30개가 있어요. 엘로라 석굴도 마찬가지고요. 불교 예술의 마스터피스가 세트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아잔타 석굴 맛보기. 와그호르 강을 접한 협곡의 경사면에 석굴 27개가 늘어져 있습니다.

인도여행 tip: 
비행기표를 예매할 땐 인도에서 유명한 앱을 이용합니다. 'Make My Trip'이란 여행 전문 앱인데 항공권, 호텔, 기차표 등을 예약할 때 좋습니다. 수많은 항공사 비행기 편을 비교해 저렴한 것 순으로 보여주죠.

여행의 시작

델리에서 2시간을 날아가면 아우랑가바드에 도착합니다. 백팩에 반소매 티와 고무줄 바지, 속옷을 대충 쑤셔넣고 엄마가 사준 라퓨마 샌들을 신었습니다. 이 샌들은 엄마의 특별한 가호가 깃든 성물이자 안전 장구입니다.

 

인도에 오기 전 안국역 인근 점집에서 점괘를 봤어요. 보살 누나가 갑자기 겁을 주는 거예요. 떨어져서 다치는 낙상(落傷)의 모습이 보이니까 신발을 내가 사지 말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라더군요. 

 

진화론자인 나는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 곧바로 이 말을 전했습니다. 몇주 후에 고향에 갔더니 독실한 불교 신자인 엄마는 라퓨마 스포츠 샌들을 사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샌들을 신으니 엄마 생각이 나는 거예요. 가족 카톡방에 여행을 알렸습니다.

 

아빠는 '잘 있지? 설날 전화해라 누구랑 가냐? 조심하고'라고 썼고, 나는 '혼자 가 조용히. 설날 전화 안 될 것 같은디 시도해볼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사는 것 같이 사네. 엄마는 허리가 휘는구먼...바빠 죽겄다. 조심히 다녀와'라고 올리더군요. 내가 '살살혀'라고 쓰자 더는 답장이 없더군요. 대화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엄마의 휜 허리를 생각하면 마음은 아팠지만, 뭘 더 어떡하겠습니까.

난 지금 인도 델리 공항으로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은 이미 아잔타 석굴의 부처님 손바닥 안에 놓였는데. 

아잔타의 불교 동굴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10번 동굴.

원래는 금요일 오후 5시 50분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이었어요. 오후 4시 30분쯤 공항에 도착하니 출발 시각이 6시 15분으로 늦춰졌다는 문자가 오더군요. 항공사 부스에서 티켓을 끊어보니 오후 7시로 재차 변경돼 있더군요. 어차피 오늘은 숙소에만 도착하면 되는 일정입니다. 인도 도처에 만연해있는 불확실성 따위는 인디아나 존스의 너털웃음으로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습니다.

 

레이즈 감자칩 양파 맛을 샀어요. 공항에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며 아그작 아그작 입에 털어 넣으니 기분 나더군요. 여행지로 떠나기 전, 날 모르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공항에 홀로 앉아서, 짭조름한, 감자칩을, 아무 걱정 없이, 먹는다. 는 이 모든 사실이 새삼 기쁘게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나흘 동안 철저하게 혼자다'까지 생각이 미치자 날아갈 것 같더군요. 

 

느긋하게 수속을 마쳤습니다.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였습니다. '오후 6시로 비행기 출발시각 변경됐음'이란 망할 인도 항공사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5시 30분에 휴대폰에 뜨기 전까지는요.

출발 25분 전에 게이트가 닫히기 때문에 순간 아연해서 - 그때 나는 출발 게이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습니다 - 돌 맞은 원숭이같이 출발 게이트로 뛰쳐나갔습니다. 

게이트 앞에 설치된 화면엔 '7시 출발 예정'이란 말이 떡 하니 쓰여 있더군요. 인도에서 가장 크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항공사. 인도의 국영항공사 에어 인디아가 동방의 등불 나라에서 온 고객 한 명을 영원히 잃는 순간이죠.

분노심 보단 차라리 안도감이 들더군요. 제대로 못 핀 담배 마저 피우러 터덜터덜 흡연실로 갔습니다.


인도 공항 심사관들은 라이터 하나까지 뺏어갑니다. 한국 공항에선 라이터 하나 정도는 허용해주는데 말이죠. 덕분에 공항 흡연실에선 불이 귀해요. 아주 직관적으로 생긴 시가라이타가 흡연실에 한쪽 벽면에 사람 키 높이로 설치돼 있습니다. '이 초록색 버튼을 누르고 위쪽 인두에 담배를 대고 있으면 불이 붙겠구나'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죠.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기계와 몇초간 빼빼로 키스 게임을 해야 합니다. 불도 잘 안 붙어서 한참을 있어야 해요.

인도 국가 금연위원회에 근무하는 천재가 흡연자들에게 굴욕을 선사하기 위해 고안한 악마의 기계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한심한 자세로 인두에 담배 끝을 대고 열심히 빨고 있다 보면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펴야 하나'란 자괴감이 들면서 나를 저주하고 싶어집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죠. 라이터 반입이 금지된 공항이란 거대한 금연 건물에 유일하게 흡연이 가능한 밀실은 흡연 욕구를 살살 건드려죠. 앞으로 2~3시간은 비행기에서 꼼짝도 못할 텐데, 그 틈새에 마련된 해방구에서 태우는 맛이라는 게 또 있는 거거든요.

 

제복을 입은 인도 공항 공무원들이 흡연실에 들어왔어요. 인도에도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라이터불을 붙여 대주는 예의란 게 있더군요. "아 선배님 먼저... "아니야 아니야, 자네가 먼저 하지." "아이고 아닙니다. 선배님! 먼저..." "음... 그럴까?" 선배는 까치발을 들고 기계와 불붙이기 키스 게임을 했습니다.

 

아, 난 혼자 오길 잘했어요.

Mr. 인디안 시가 굿굿

2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후 9시에 아우랑가바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시간인데도 예상처럼 택시 기사가 까맣게 몰렸어요. 그 사이로 내가 묵는 KAILAS 마크가 프린트된 종이를 든 기사도 있었습니다. '같은 숙소에 묵는 손님이 미리 예약을 했나 보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습니다.

"땍시? 유 원 땍시?" 따라붙은 다른 택시기사를 잡았습니다. KAILAS 호텔에 가자고 하자 200루피(약 3,500원)을 달라는 거예요.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웬 떡인가 싶어 얼른 탔습니다.


10분을 달리더니 다 왔다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공항 근처에 KAILAS란 이름의 호텔이 있었던 거예요. 이 기사는 영어가 아주 짧았습니다. "엘로라 바로 옆의 KAILAS 호텔이다"를 간신히 설명했어요. "오께이 오께이" 하더니 1,800루피(약 3만 2,000원)을 부르는 겁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싶어 가자 했습니다. 공항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다시 흥정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예측 가능한 상황이 되자 안정감이 들면서 담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더군요. 안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느냐고 물으니 "문제없다"고 합니다.

 

시골 택시 인심은 후해서 인도 남부 고아 여행 때도 택시 안에서 담배를 태우는 게 별 문제가 안 됐거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도 택시 기사들은 담배를 태우든 안 태우든 간에 운전석 캐비넷엔 항상 성냥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라이터 하나 없는 불행한 나로서는 성냥을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항상 택시에서 내려야 했는데, 그간 나의 절도 행각을 지적한 택시기사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풋내 풀풀 나는 외국인 승객에겐 이미 성냥 값을 훌쩍 뛰어넘는 바가지를 씌웠기 때문이겠죠.

 

신나게 피워대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갑자기 품 안에서 담배를 쓱 꺼내는 거예요.

"인디안 시가! 로깔(Local) 시가!" 한 대 물고 다른 하날 나에게 주더군요. 조악하게 말린 담배를 보자마자 의심했어야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피웠는데 몇 분 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겁니다.

겁이 났어요. 아빠가 그렇게 신신당부하던 '조심하라'는 말들이 그제야 벌떼같이 일어나 머리속을 붕붕거렸습니다.

'조심하라' '사람을 조심하라' '이 사람은 처음 본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선의를 아무 의심없이 넙죽 받아들인 나는 병신이다' '이 차는 산길을 가고 있다' '나는 이 나쁜 새끼한테 납치될 것이다' '난 팔려갈 것이다' '난 죽는다' 이런 망상이 점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나는 무서워졌습니다.

 

아마 그가 내게 건넨 담배에 분명히 현지 사람들이 즐겨 피우는 마약 성분이 첨가돼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아, 혼자 오길 잘못한 거였어요. 택시 기사가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데 잘 들리지도 않아요. 머리가 빙빙 도는 와중에 앞좌석에 눈 초점을 맞추고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빨아들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습니다.

내일 갈 엘로라 석굴에 있는 부처님을 상상하며 그분께 나의 무사 생환을 빌었습니다.

그때 난 아주 말년의 궁예처럼 미친놈이 되서, '어지럽다고 이대로 시체처럼 누워버리면 어디로 팔려갈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길 20분이 지났을까,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좀 괜찮아지더군요. 기사에게 이 담배가 도대체 뭐냐고 따졌습니다. "인디안 씨가, 굿? 굿?"만 반복해대기에 그만뒀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살았다'는 환희와 안도가 뼛속까지 스며든 상태였으니까요.  

 

드디어 KAILAS 호텔에 살아서 도착했습니다. 호텔에서 듣게 된 이야기지만, 난 공항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KAILAS 호텔 프린트를 든 남자에게 말이라도 걸어봤어야 했어요. 여기까지 1,000루피라더군요.

 

망할 '씨가 굿굿' 택시 기사 놈을 잡아 해코지를 단단히 하고 싶어졌죠.

엘로라, KAILAS 호텔

호텔은 하숙집 아저씨가 침이 마르게 추천한 KAILAS로 정했어요.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떨어져 있는 엘로라 석굴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100m 되는 지근거리에 있습니다. 엘로라 석굴이 있는 시골에 호텔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KAILAS호텔. 여름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이 낙엽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인도의 여름은 나무에게마저 혹독하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5월이면 여름인데, 겁이 납니다.

KAILAS는 호텔이라기보단 넓은 정원에 벽돌 시멘트로 만든 방갈로가 여러 채 놓여 있는 곳입니다. 사위가 조용한 데다, 엘로라 석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떡 하니 입지해 있어서 '무슨 수를 썼기에 정부 허가를 받은 거야'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편하고 좋은 곳 냄새 맡는 데는 귀신인 유럽 여행객들이 장기 투숙을 많이 한대요. 낮엔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산책도 한답니다.

 

이 호텔의 운영 원칙엔 비범한 구석이 있어요. 수많은 호텔 예약 어플이나 중계사이트와 거래하지 않고 호텔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통해, 혹은 전화상으로만 예약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방문하는 시골 호텔인 거죠. 하룻밤 자는 데 3,000루피(약 5만 3,000원)인데, 수년째 가격이 같아요. 에어컨 없는 방은 2000루피. 그러니까 사장님이 돈 욕심 크게 안 부리고 '이쯤만 하면 된다'는 철학을 가진 호호 할아버지인 거죠.


로비에 들어서자 원래 있을 자리보다 한참 내려가 코에 걸쳐진 안경을 낀 사장 할아버지가 정중하게 나를 맞습니다. '오호라, 니가 용케 여길 알고 왔단 말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이죠. 나는 여행 이틀 전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묵으려는 날과 간단한 개인 신상을 입력해 예약했어요. 이메일로 '님께. 2월 5,6,7일 예약됐습니다. 감사합니다.' 3줄 답장이 온 게 끝이었어요. 바우처 따윈 필요 없습니다.

 

사장님에게 내 이름을 대자, 그는 여권을 확인한 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호도르랑 똑같이 생긴 작고 뚱뚱한 아저씨를 부릅니다. 검은 점토 인형같은 사람이 씨익 선하게 웃는 모습에 단숨에 호감이 갔습니다. 너무 해맑고 귀여운 사람이었어요.

호텔에 까지 새끼를 데려 온 긴꼬리 원숭이 엄마. 인도인 관리인이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휙휙 휘두르며

키를 받아든 KAILAS의 호도르는 말없이 뒤뚱거리며 나를 앞장섰습니다.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은 채 방갈로로 직행해 익숙한 솜씨로 문을 열고 나를 안내했습니다. 싱글배드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놔 퀸 사이즈를 만들어놨더군요. 화려하진 않지만 정돈되고 산뜻한 방이었어요.

 

밤이 깊었지만 너무 허기가 져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방으로 주문했어요. 삼대 주린 걸신이 돼 순식간에 위장에 쑤셔넣고 그대로 침대에 무너졌습니다. 조금 어지러웠거든요. '인디안 씨가 굿굿'씨를 원망할 틈새도 없이, 사방에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를 덮고 잠에 빠졌습니다.

바다 휴양지, 고아(Goa)

첫째 날은 밤늦게 숙소에 도착한 관계로 제대로 뭘 본 게 없습니다. 지난달 갔다 온 바다휴양지 고아 이야기나 잠깐 하겠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캘링것(Calangute) 비치의 여인들. 서빙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200루피를 주면 선비치에서 마사지를 해준다고 했는 데 손목이 철사줄처럼 가늘어서 힘이나 쓸 까 싶어 거절했습니다. 대신 코카콜라를 주문했습니다. 팹시 말고.

나는 태양과 바다가 찰싹 붙어 있는 아열대 휴양지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특별히 사랑합니다. 태양에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에 뿌려진 디젤 매연이 따뜻하고 습한 바닷바람에 올라타며 풍기는 냄새라고 멋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냄새는 나에게 '아! 더운 나라의 바다에 왔구나'란 명백한 실감을 줍니다.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 바다 휴양지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를, 처음 고아 땅을 차로 달리며 창을 열었을 때 맡을 수 있었어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내는 소리에 집중하며 가만히 눈을 감으면, 가슴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르죠. 바다 휴양지에 도착한 초반에만 느낄 수 있는 이 고양감은 강력한 해독 물질이어서,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누적된 피로를 삽시간에 용해해버립니다.

큰 해변인 바가(Baga) 비치. 사람도 많습니다. 한국사람 노는 거랑 똑같이 발 담그고 파도 맞으면서 놉니다.

남인도 아라비아해를 접한 고아는 수십 킬로미터 해안선에 수많은 해변을 가지고 있어요. 고아 바다는 동남아의 여느 휴양지보다 깨끗했습니다. 개발업자들의 손이 아직 미치지 않았는지 백사장들이 자연 그대로였어요. 사람들로 붐비는 거대한 해변부터 조촐하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해변까지 종류도 다양했죠.

 

거리는 여느 인도 거리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빵빵거리는 소음으로 시종 귀가 따갑습니다. 하지만 차에 내려 바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뜰채에 고운 모래만이 남듯, 귀에는 파도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만 맴돌아요. 고아엔 하얀 침묵으로 덮인 백사장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캘링것 비치의 선배드.

아시아인은 거의 없었어요. 바다휴양지를 즐기기엔 가까운 동남아가 경제적이니 그런 것이겠죠. 주로 영국·러시아 관광객이 태양에 몸을 태우고, 인도 아주머니는 침묵을 깨기 싫다는 듯이 조용하고 빈틈없이 서빙업무를 수행하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 비치에 누워 맥주를 들이켠 뒤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잤습니다.

깨끗하다는 의미는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정서나 휴양지 분위기에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일전에 방문했던 태국 파타야의 바다는 더러웠고 특히나 성을 사고 파려는 사람들로 어지러웠어요. 스무살이 갓 돼 보이는 아가씨의 손을 잡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낮에 배 나온 아저씨들을 발에 차일 정도로 볼 수 있었죠.

 

밤이 되면 1km는 돼 보이는 파타야의 중심거리 '워킹스트리트' 양쪽에 즐비한 온갖 술집과 누드바(Bar)들이 휴양지의 주인이 됩니다. 이 거리를 걸으면 포주들이 주변에 달라붙어 길을 막고 어깨동무를 하며 호객을 하죠. 입간판처럼 서 있는 트랜스젠더나 아가씨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추파를 던지고 흥정을 걸어왔어요.

 

파타야를 다녀온 뒤 비로소 나는 왜 태국 국교가 불교인지 알았어요. 지옥이 파타야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특이한 볼거리이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고아는 이와 달랐어요. 저녁이면 해변에서 귀를 찢는 음악에 사람들은 미친 듯 몸을 흔들지만, 파타야의 여느 여행객보다 자연스럽고 쾌활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듯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