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의 판도를 바꾼 스마트한 혁명

Editor's Comment

매년 가을, 런던에서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London Design Festival)이 열립니다.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디자이너, 아티스트, 기관 단체가 참여해 최신의 디자인 트렌드를 공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보입니다. 삼성전자에서 프리미엄 가전을 디자인했던 김병수 저자가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 다녀왔습니다. '영감을 주는 모든 디자인 -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17'의 두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리포트는 
2017년 12월 19일(화) 오후 5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3D 프린팅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여러 매체에서도 앞다투어 보도합니다. 글로벌 마켓 분석기관인 IDC에서 발행한 3D 프린팅 리포트에 따르면 2020년까지 전 세계 3D 프린팅 시장이 약 38조 원까지 커질 것으로 추산합니다.

 

3D 프린팅이 활용되는 분야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중 가장 많이 이용되는 분야는 컨셉 확인(proof of concept)과 프로토타입(prototype) 제작 분야입니다. 여기서 컨셉 확인이란 기업에서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자신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제품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휴대폰을 예로 들자면, 손으로 쥐었을 때 사용자에게 적합한 사이즈인지, 혹은 디자인 관점에서 다듬어야 할 점은 없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프로토타입은 컨셉 확인과 비슷한 개념으로, 샘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기업에서는 소비자가 구매하는 시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수없이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만듭니다. 영국의 혁신적인 기업 다이슨(Dyson)은 청소기 브러시를 하나 만드는데 1만여 번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검증했다고 합니다.

 

포브스(Forbes)에 실린 분석자료*에 따르면, 컨셉 확인이 34%, 프로토타입이 23%로 두 가지 영역이 3D 프린팅 전체 이용 분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3D 프린팅이 주로 대기업에서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 관련 기사: 'The State Of 3D Printing, 2017' (Forbes, 2017.5.23)

 

인하우스 제품 디자이너(in-house designer, 기업에 소속된 디자이너)였던 저 역시도 빠른 컨셉 확인을 위해 3D 프린터를 자주 활용하였습니다. 참고로 제품을 디자인하고 실제로 출시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이 요구됩니다. 제가 컴퓨터 상으로 디자인한 모델을 실물로 보기까지 몇 달 이상이 걸리지요.

 

그러나 3D 프린터를 활용한다면, 실물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40cm 이내의 제품인 경우 하루 이틀이면 실물 확인이 가능합니다. 특히 손으로 잡고 사용하는 핸들의 경우, 인체공학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테스트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수십 번씩 3D 프린터로 출력하여 손의 그립감이나 버튼에 대한 촉감 등을 세밀하게 살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대개 3D 프린터는 산업용으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이쪽 분야와 관련이 없는 분들에게는 생소하실 겁니다. 실제로 현재 한국 제품 시장에서 3D 프린터를 활용한 제품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시장에서는 3D 프린터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 산업용도 이외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3D 프린터가 디자인과 만난 훌륭한 사례들을 살펴보며, 다양한 분야와 3D 프린팅의 융합 가능성을 전망해보겠습니다.

디자이너의 강력한 무기가 된 3D 프린터

최근 디자이너들에게 3D 프린터는 자신들의 독창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2017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되었던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요리스 라만(Joris Laarman)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3D 프린터를 활용한 가구 디자인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체의 뼈에서 영감을 받은 유기적인 형상과 실험적인 스타일의 조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실제로 요리스 라만의 작품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작품의 형상들이 매우 독특하여 100% 수작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던 작업물이 있습니다.

©Joris Laarman, 2007

첫 번째 이미지는 인체의 뼈를 닮은 유기적인 형상을 갖춘 의자입니다. 이 의자는 3D 프린터로 출력된 91개의 부분으로 나뉜 몰드(mold, 제품을 만들기 위한 틀)에 레진(resin, 송진) 혼합물을 부어서 만들었습니다.

©Joris Laarman, 2007

위 이미지를 보면, 다양한 부분으로 틀이 나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만약 저렇게 복잡한 틀을 대량생산하였다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직접 3D 프린터로 출력하여 틀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격을 최소화하면서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요리스 라만의 작품은 일상에서 접하기 쉬운 형태는 아닙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번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만난 디자이너들의 제품은 3D 프린팅이 우리 곁에 한 걸음 더 다가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영역으로 말이지요.

린 맥라클란 스튜디오의 혁신적인 디자인

첫 번째로 소개할 디자인은 린 맥라클란 스튜디오(Lynne MacLachlan Studio)의 작품들입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기반으로 하는 린 맥라클란 스튜디오(이하 린 스튜디오)는 디지털 툴을 활용하여 실험적인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창업자인 린 맥라클란은 영국 명문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CA) 출신으로, 모델링과 3D 프린팅을 통하여 복잡하지만 매우 정교한 형태를 디자인함으로써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물에 염색, 연마, 광 등 수작업을 곁들여서 정교함을 더합니다.

 

린 스튜디오의 특색은 3D 프린팅을 활용하여 주얼리와 인테리어 소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스튜디오의 목표는 원색에 가까운 생동감 넘치는 색상을 주로 사용한 작업물로 사람들에게 시각적인 즐거움(visual delight)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린 스튜디오의 두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김병수

먼저 주목할 작품은 린 스튜디오의 'Entangle' Wall Tiles입니다. 강렬한 색감과 인상적인 외형 덕분에 주목받았던 이 작품은 3D 프린터로 제작된 벽걸이형 인테리어 타일입니다. 멀리서 보면 구불구불한 뱀 모양 같기도 합니다.

 

이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 작품은 수학적 타일의 원리와 양자 역학의 원리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즉, 작품의 개별 부분이 모듈로 나누어져서 무한으로 모양을 설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지의 형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반원 단위로 끊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원 단위의 모듈과 쿼터 단위의 연결고리 모듈을 3D 프린터로 출력하여 결합하여 만든 형상입니다. 아래쪽에는 다양한 프로토타입들이 놓여있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프로토타입의 단면까지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여, 자신들의 제작 원리를 기꺼이 소개한다는 점입니다. 요즘 많은 제품 디자이너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만, 제작기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세히 소개하여 무단복제를 방지하면서도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김병수

위 이미지에서 놓여있는 단면을 자세히 보면, 위아래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아래 부분을 따로 출력하고 모듈을 만들어서 원하는 모양으로 이어 붙이는 원리입니다. 이러한 두 개의 모듈형 부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실내에 다양한 웨이브 패턴, 매듭 디자인, 복잡한 반복 패턴 등 무한대로 형상의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재질은 나일론이기 때문에, 원하는 색상으로 원하는 색으로 염색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가적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3D 프린터인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방식의 3D 프린터는 선으로 된 필라멘트를 녹여서 적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Technology ©Solid Concepts

 

대부분의 필라멘트는 ABS나 PLC 같은 플라스틱 재료로 적층하여 제작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다양한 소재들이 사용됩니다. 그중 나일론 소재는 염색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 나일론 소재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3D 형상 가공 후 염색을 통해 선명하면서도 다양한 컬러의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나일론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유연한 소재이기 때문에 귀걸이나 팔찌 등등의 액세서리로 사용하더라도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제 이 스튜디오의 또 다른 3D 프린팅 작업물인 'Phase' 주얼리를 소개하겠습니다.

©Lynne MacLachlan Studio

'Phase' 주얼리는 3D 프린팅을 활용하되 다른 소재로 디테일을 살린 작품입니다. 이 주얼리는 맞춤형(on-demand)으로 주문 및 생산되어 2~3주 이내에 배송됩니다. 특히 반지 제품은 고객의 손가락 두께에 맞추어 맞춤형 제작도 가능합니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나일론 소재만으로는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얼리에 큐빅을 곁들여 섬세함을 한층 강조한 것입니다. 3D 프린팅 자체만으로는 소재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스튜디오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다른 소재를 찾아 제품의 디테일을 높인 것입니다.

스튜디오 말링코, 맞춤제작과 대량생산을 동시에 잡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점을 둔 스튜디오 말링코(Studio Malinko)는 조금 더 캐주얼하면서 일상적인 제품들을 디자인합니다. 조명, 홈웨어, 주얼리, 패션 제품 등입니다. 이들 역시 3D 프린팅과 같은 기술과 수작업의 조화를 통해 제품의 디테일을 다듬는 작업을 합니다.

 

3D 프린터의 출력물은 소재에 따라 다르겠지만, 플라스틱이나 나일론의 경우 소재의 표면이 거칩니다. 따라서 정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작업이 필수입니다. 물론 이러한 거친 표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여 디자인의 요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고객 중심으로 맞춤제작(customizing)을 하면서도 대량생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합니다. 물론 '맞춤제작'과 '대량생산'은 상반된 말처럼 들리지만, 3D 프린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3D 프린터가 발전하면
'맞춤제작'과 '대량생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병수

이제 본격적으로 말링코 스튜디오의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위 이미지에서 보이는 조명 역시 비슷한 형상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린 스튜디오의 벽걸이 타일 역시 모듈형이었습니다.

 

3D 프린터를 활용한 디자이너들이 모듈형 방식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3D 프린터가 출력할 수 있는 크기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싸고 거대한 3D 프린터의 경우 상대적으로 큰 크기도 출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처럼 큰 제품을 3D 프린터로 출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자동차를 3D 프린터 자체에서 통째로 뽑은 것이 아니라, 부분을 나누어서 뽑은 뒤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입니다. 특히 이런 소규모 스튜디오의 경우 비용 문제 때문에 보유 장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을 것입니다.

©김병수

©김병수

두 번째 이유는, 소재 자체가 유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적인 느낌의 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부분을 잘게 나누어 부분별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해야 합니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 스튜디오 말링코에서는 장식이 달린 손거울과 물건을 걸어놓을 수 있는 액세서리 등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주문받고 판매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한 린 스튜디오에 비하여 캐주얼한 제품들이라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패션과 기술의 눈부신 융합

3D 프린팅을 활용하는 분야가 가구나 공예 쪽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패션 분야에서도 3D 프린팅은 상당히 발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3D 프린팅 의류로 유명한 드닛 펠레그(Danit Peleg)입니다. 몇 년 전 테드(TED)에 출연하여 그들의 작업을 자세히 소개한 이후, 다양한 국제 패션쇼에서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2016 패럴림픽의 오프닝 세리머니에서 헤드라이너 댄서가 이 옷을 입고 춤을 춰서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기술과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분야도 융합이 되었을 때 창조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Danit Peleg

드닛 펠레그의 드레스 역시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류이기 때문에 특히나 유연성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용한 소재 역시 앞서 소개한 제품 디자이너들이 사용한 나일론이나 플라스틱이 아니라, 유연성 있는(flexible) 필라멘트입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지만, 제품의 촉감이 중요한 의류에 활용하기에는 좋은 소재입니다. 물론 실제로 입었을 때 우리가 평상시에 입는 옷들처럼 편하거나 촉감이 부드러울 수는 없지만요.

3D 프린팅이 연 새로운 기회의 문

디자인 분야 이외에도 이미 의학이나 공학 분야에서 3D 프린팅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영역에 계시는 분들에게 3D 프린팅은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만약 비전문가가 3D 프린터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모델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3D 모델링이 선행되어야 프린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델링 툴에는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라이노세로스(Rhinoceros)나 오토데스크(Autodesk) 혹은 맥스(Max)나 마야(Maya) 등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지멘스(Siemens)에서 만든 NX 프로그램을 사용하였습니다.

 

각각의 프로그램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제가 사용했던 NX의 경우, 매우 비싼 프로그램이지만 실제 개발에는 정교함을 갖춘 매우 실용적인 툴입니다. 가장 중요한 3D 프린터의 경우,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성능도 다르지만 집에서 개인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은 100만 원 이하로 가격이 많이 저렴해진 편입니다.

기술적인 요인을 넘어서
아이디어 관점에서 보아도
3D 프린팅은
매력적인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를 들었던 것처럼, 전통적으로 수작업으로 진행되어왔던 영역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상 속 작은 영역에서도 3D 프린팅과 융합할 수 있는 요소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앞으로 3D 프린팅이 어떤 새로운 영역들과 만날지 기대됩니다.

 

[영감을 주는 모든 디자인 -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17]

 

삼성전자에서 프리미엄 가전을 디자인했던 김병수 저자가 '소재(material)' 관점에서 관찰한 여러 프로젝트와 전시를 사진과 글로 기록하려 합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보석 같은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프로젝트, 최신 해외 디자인 작업 트렌드를 생생하게 전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