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만난 동물들
잘 알다시피, 인도 거리에는 소떼가 다닙니다. 내게 보다 강렬하게 다가온 동물은 돼지였어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모든 나라엔 고양이만을 위한 자리가 있다'라고 했던가요? 나는 그에게 "센세, 인도엔 돼지만의 자리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에서 길고양이를 볼 확률 정도로 돼지를 볼 수 있어요. 성급하게 꿀꿀거리지도 않아요. 느긋하고 조용하게 먹이를 찾는 귀여운 동물이었습니다. 인도는 확실히 동물들의 천국이에요. 소, 돼지, 개가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한국이었으면 벌써 다 사람들 뱃속에 있겠지만.
인도인들은 육식을 즐기지 않아요. 식당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를 따로 갖고 있고,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들도 많습니다. 인도인들은 육식해도 닭을 많이 먹죠. 힌두교인은 소를 안 먹고, 이슬람인은 돼지를 안 먹으니 먹을 건 닭뿐인가? 종교, 기후 등 다양한 깊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알고 싶진 않습니다.
인도 친구들과 식당에 가면 항상 "아유 베지(베지테리언)?"이라고 묻더군요. 제 대답은 항상 이렇습니다. "아임 하드코어 난(non) 베지". 자기들도 웃더라고요. "비프 먹고 싶어"라고 생각 없이 씨부렁거렸다가 미개인 취급도 당할 뻔했습니다. 여하간 고기가 귀한 나라예요. 카레에 있는 닭고기만 먹다 KFC에 한 달 만에 가서 크리스피 치킨을 미친 듯이 뜯었을 때의 만족감이란, 아무도 이해못하시겠죠.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만, 키워본 적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뒤로 아파트에서 줄곧 살았던 부모님은 '털 날리고 냄새 난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애완동물 키우기를 극도로 꺼렸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벅차요. 애완동물은 사랑스럽지만, '마당이 있으면 개를 키운다. 하지만 집 안에선 역시 아니다' 입니다.
처음 동물과 유대감을 확인했던 때는 의무소방으로 복무했던 군 시절이었습니다. 소방서 식당에서 밥을 해주시던 아주머니가 소방서 뒷마당에서 '삼순이'라는 똥개 아가씨를 키웠죠. 어느 날 떠돌이 애꾸눈 하얀 개가 삼순이 주변을 기웃거렸습니다. 상처로 제 기능을 잃고 하얗게 변해있는 한쪽 눈과, 누렇게 때가 탄 털은 그의 고난을 증명하고 있었죠. "못생긴 개새끼야!" 식당 아줌마는 애꾸눈이 재수 없다며 삼순이 곁을 도는 그를 싸리 빗자루로 내쫓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아주머니는 핸드폰을 뒤적거려 개장수 번호를 찾았습니다. 애꾸눈 개는 살과 뼈가 분리됐어요. 육신은 소방관들과 내 배에 들어갔습니다. 복날에 똥개는 똥이 됐죠. 그런 시골 인심으로 애꾸눈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니, 삼순이 곁을 떠났죠. 그랬는데 어느날부터 삼순이 배가 불러오는 거예요. 흰색 2마리, 황색 2마리를 낳았어요. 개가 출산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눈도 못 뜨는 강아지들은 졸지에 유복자, 아니 유복견이 돼버렸어요. 개 팔자죠.
새끼를 낳아본 적 없는 삼순이는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도 몸에 새겨진 디엔에이에 따라 혼자 탯줄을 끊고 새끼를 혀로 핥고 젖을 물렸어요. 그해 다가오는 가을의 경이는 모두 삼순이와, 그 핏덩이 몫처럼 느껴졌죠. 나는 당시 구조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각종 사건 사고를 따라다니며 싸늘한 주검을 마주한 횟수도 열 손가락을 넘어선지 오래였죠.
지독하리만치 허망한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서 나는 슬프다기보다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마주치는 시체가 많아질수록 감수성은 메말라만 갔고, 허무감만 짙어질 뿐이었어요. 그때 마주한 삼순이와 그 새끼들은 저들이 가진 순수를 나에게 나눠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뒤로 개를 먹지 않습니다. 그 뒤로 삼순이는 제 남편을 잡아죽인 소방가족들을 꼬리치며 반겼지만요.
인도 거리를 거닐면 온갖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감쌉니다. 새 종류도 다양해서 분간이 쉽질 않아요.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다는 한 인도인은 "서울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죽은 도시 같았다"고 말하더군요. "니가 닭둘기를 못 봐서 그래. 몽땅 다 죽여서 서울을 진짜 죽은 도시로 만들고 싶군"이라고 했는데 영어가 짧아서 그가 이해했는지 모르겠어요.
비둘기는 여기서 길조입니다. 내 화장실 건너로 집을 지어놨죠. 새끼들이 하루종일 꾹꾹 데는데, 뿌연 유리창 너머로 실루엣만 보입니다. 그렇게 보니 나름 귀여워서 참고 있습니다. 특히 나무가 많은 구릉지역을 가면 공작새를 쉽게 볼 수 있어요.
집에서 30분 정도 걸으면 낮은 산에 있는 힌두 사원이 있는데, 해 질 녘 공작들이 노니는 자태는 사뭇 경건합니다. 인도 왕족을 상징하는 신성한 새라고 해서 포획은 금지입니다. 공작 고기가 정력에 좋다고 하는데, 왕족들이 자기들만 자손 많이 나으려고 금지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하죠.
인도에서 만난 친구들
처음 사귄 인도 친구들은 비크람과 아미트입니다. 스물셋, 스물하나 된 친구들인데 대학을 막 졸업하고 직장을 찾기 시작했어요. 무작정 아무나 사귈 순 없으니까 꾀를 냈습니다.
인도에 있는 한국문화원이 하는 행사 때 눈여겨 물색했죠. 제일 순한 관상을 가진 친구들이어서 살살 접근했습니다. 1~2년 동안 문화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해서 한국말도 곧잘 하고, 무엇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친구들이라 얼씨구나 했죠. 델리대를 다닌 데다가 생긴 건 장동건, 소지섭인데 여자들한테 영 인기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으로 치자면 1980년대 강원도 삼척, 영월 출신의 서울대생이었습니다. 서울 도련님이 아니면 서울깍쟁이 아가씨한테 명함 내밀 계제가 아닌 거죠. 뭐 어떡하겠습니까.
"형이 밥값은 낼 테니까 델리 구경이나 시켜줘라"고 슬슬 꼬드겨서 함께 델리 시내 곳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비크람은 채식주의자이지만 술, 담배를 합니다. 반면 아미트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술, 담배를 못해요. 같이 데리고 다니기 짜증 납니다. 그래도 내가 아쉬운 처지라 할 수 없죠. 몇 번을 같이 놀고 나서, 비크람은 자기가 사는 대학생 기숙사 촌에 절 초대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형, 인도에선 아무나 믿으면 안 돼.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해. 나조차도 믿지 마.
이쯤 되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거죠. 이제 그 기숙사 건물은 아지트가 됐습니다. 주말에 심심하면 언제든 놀러 가서 그곳 친구들과 물담배 피우고 술을 마십니다. 아미트는 주말에 가족들과 사는 집에 날 불러 어머니표 점심을 대접했죠. 내가 떠날 때 아미트 어머니가 베란다에까지 나오셔서 손은 흔드시는데, 우리 엄마 생각나서 울뻔했어요.
내가 인도에 온 뒤로, 한국 친구들의 첫인사는 하나같이 이것이었습니다. "인도 살 만하냐." 내 대답은 이겁니다.
마음 편해. 인도에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서, 할 수 있는 것만 집중하게 되지. 한국에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데에서 비극과 영광이 싹튼다네 친구여.
모든 경험이 첫 경험인지라, 인도에서의 고생은 재미로 느껴집니다. 모든 것이 그럭저럭 아름다웠지만, 델리 시내의 대기 오염은 견디기 힘들었어요. 델리 시내를 싸돌아다녔더니 인도에 도착한지 일주일만에 목감기에 걸렸어요. 가래 섞인 기침이 한달동안이나 계속됐죠.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해 세계 1600개 도시의 대기 오염도를 조사한 결과, 뉴델리는 대도시 중 최악으로 꼽혔어요. 특히 초미세먼지(2.5㎛ 이하) 농도가 세계 최고입니다. 인도 주재 미국 대사관이 올해초 발표한 겨울철 두달간(12~1월) 뉴델리의 초미세먼지 평균 농도(226㎛/㎡)는 베이징의 2.4배, WHO 권고 기준의 10배를 기록할 정도죠. 특히 경유 자동차들이 원흉으로 지목됩니다. 850만대 차량이 등록돼 있는데, 이 가운데 50% 이상이 디젤을 사용해요.
특히 겨울철(11월~3월)에 초미세먼지 농도가 평소보다 3배 정도 증가합니다. 11월 최대 명절 디왈리 축제 때 불꽃놀이가 곳곳에서 이뤄져 각종 유해물질이 발생하는데다, 거리를 가득 메운 노숙인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타이어·종이·나무 등을 닥치는대로 태우기 때문이죠.
지난 1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3일간 인도에 방문했을 때, 블룸버그 통신의 기사 제목은 이랬어요. "사흘간 인도 공기를 마셨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수명이 6시간 단축됐다." 그럼 인도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한 이야기들을 다음 편지에 소개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