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에 케냐의 작은 마을로 떠난 브로콤을 만나다

Editor's Comment

달리기에 푹 빠진 아마추어 마라토너, 김성우 저자가 케냐로 날아가 '챔피언들의 아버지' 브로콤을 만나 생생하게 전해 들은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김성우 님과 코치 브로콤의 교감이 담긴 자세한 인터뷰 전문은 리포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문이 실린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리포트는 9월 5일 오후 6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1976년, 이제 막 졸업장을 손에 든 26세의 아일랜드 청년은 고민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을지를. 지리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청년은 케냐 고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인 이텐(Iten)의 성 패트릭 고등학교에 교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4살 때부터 '성 파트리치오 교직 형제회' 일원으로 봉사해온 브로콤*은 그 즉시 전기와 수도 시설이 없던 이텐으로 향했다.

*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인 브로콤의 본명은 Colm O’ Connell인데, 사람들은 '형제님(Brother)'이라는 호칭을 이름 앞에 붙여서 그를 브라더 콤(Brother Colm)이라 부른다. 본 글에서는 '브로콤'으로 표기를 통일한다.

 

성 패트릭 고등학교에 도착한 브로콤은 학생들이 방과 후에 할만한 활동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학생 스스로가 경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험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갈 때 도움을 줄 테니까. 육상이나 스포츠에 아무런 경험이나 지식이 없던 브로콤이 이텐의 학생들에게 달리기를 가르치게 된 이유다.

 

브로콤은 지금까지 수백 명 이상의 어린 선수를 코칭했다. 그의 지도 아래 훈련한 선수 중 25명 이상이 세계 육상 대회에서 금메달을, 4명의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한 명의 육상 코치가 이만큼이나 많은 세계 정상급 선수를 배출한 예는 없었다.
*  브로콤이 배출한 정상급 선수 중 일부

여자 선수들

에드나 킵라갓(Edna Kiplagat): 뉴욕 마라톤 우승(2010), 런던 마라톤 우승(2014), 시카고 마라톤 2위(2016), 보스턴 마라톤 우승(2017),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 마라톤 우승(2011 대구, 2013 모스코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마라톤 2위(2017 런던) 등의 경력 보유
메리 케이타니(Mary Keitany): 런던 마라톤 3회 우승(2011, 2012, 2017), 뉴욕 마라톤 연속 3회 우승(2014, 2015, 2016)의 경력 보유


남자 선수들
이브라임 후세인(Ibrahim Hussein): 호놀룰루 마라톤 우승(1985, 1986, 1987), 보스턴 마라톤 우승(1988, 1991, 1992), 뉴욕 마라톤 우승(1987) 등의 경력 보유
데이비드 루디샤(David Rudisha): 현재 800m 세계 기록(1:40.91) 소유자이다. 올림픽 2회 연속 우승(2012 런던, 2016 리오),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2회 우승(2011 대구, 2015 베이징) 등의 경력 보유

* 다큐멘터리 < Man on a Mission - Br O'Connell and the rise of Kenyan Athletics > ©Jamie D'Alton

 

다큐멘터리 < Man on a mission >을 통해 브로콤의 코칭 철학과 선수 훈련 방식 등을 엿볼 수 있었지만, 나는 직접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청년 브로콤은 왜 아일랜드에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케냐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로 향했을까?', '달리기에 아무 지식도 없던 브로콤이 어떻게 이토록 많은 세계적 선수를 육성할 수 있었을까?', '브로콤은 자신의 선수를 어떻게 대할까?'

 

무작정 성 패트릭 고등학교로 찾아가 만난 그에게선 '강한' 코치의 모습보다는 할아버지 같은 인자함과 진중함이 느껴졌다.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브로콤과 대화를 이어갔다.

편견을 넘어 세계의 주목을 받다

육상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브로콤은 달리기에 대한 어떠한 경험이나 지식도 없었다. 브로콤 역시 학생들을 통해서 달리기를 처음 접했다. 학생들이 어떻게 뛰는지, 훈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며 함께 배운 것이다.

 

브로콤은 학생들이 달리기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두 가지 편견을 먼저 무너뜨려야 했다. 하나는 달리기 선수가 되려면 난디(Nandi) 지역 출신이어야 한다는 편견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자는 달리면 안 된다는 사회적 시선이었다.

 

난디 출신이 아닌 학생들과 여학생들은 달리기를 자신과는 무관한 운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 케냐 사회는 여성을 '신붓감'으로만 바라보았기에 여성이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브로콤은 서두르지 않았다. 케냐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생긴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 채워갔다.

케냐의 올림픽 보이콧은 제게 육상이란 스포츠를 천천히, 인내하며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주었어요. 세계 무대에서 큰 성과를 낼 선수를 육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하나도 없었죠. 그런 대회에 나갈 기회조차 없었으니까요.

저와 학생들은 '좋아, 우리 한번 육상을 같이 배워보자'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차근차근 배워 갔죠. 당시 제가 엘리트 수준의 선수들을 가르친 게 아니었어요. 저와 같이 육상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을 가르쳤었죠. 14살부터 16살 정도의 학생들이었어요.

- 브로콤(이하 생략)

끈기 있게
천천히 하자
브로콤이 가르친 첫 세대 선수들은 큰 성공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첫 세대 학생들과 겪은 많은 실패와 실험을 자양분 삼아 케냐의 어린 학생에게 맞는 훈련법이 차차 개발되었다. 브로콤이 케냐로 온 지 12년 만인 1988년 서울 올림픽, 브로콤과 함께 훈련한 선수 중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가 나왔다.

 

이후 케냐의 첫 여성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챔피언, 살리 바소스치오(Sally Barsosio)처럼 세계적으로 성공한 여성 선수들이 나오면서, 여성을 '신붓감'으로만 보던 케냐의 사회적 편견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브로콤과 훈련한 학생들이 뉴욕, 보스턴, 서울, 바르셀로나 등 마라톤 대회의 시상대를 점점 휩쓸자 사람들은 '이텐'에 주목했다. 수많은 나라의 취재진과 선수, 코치가 '케냐 시스템'을 보기 위해 이텐에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브로콤은 강조한다. 결과물만 봐서는 안 되며,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봐야 한다고.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데이비드 루디샤(David Rudisha)*를 보고, '나도 루디샤가 지금 하는 훈련을 하면 루디샤처럼 뛸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의 루디샤가 있기까지 그 과정을 보지 못했어요. 단지 현재의 루디샤만 보고 따라 하려는 거죠.

* 데이비드 루디샤(David Rudisha): 현재(2017.8 기준) 육상 800m 세계 기록(1:40.91) 소유자

이어서 브로콤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아홉 가지 코칭 철학을 알려주었다.

브로콤의 아홉 가지 코칭 철학

브로콤(본명 Colm O' Connell) &#169;Hill Ten Films

1. 시스템 혹은 프로그램보다 선수가 먼저

코치가 된다는 건, 스포츠 지식을 가르치는 일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습니다. 코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훈련 방법을 알고, 그를 반영해 좋은 전술을 짤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같이 커 가는 선수를 향한 관심이 훨씬 중요해요.

2. 훌륭한 선수가 될 가능성과 기질은 이미 선수 안에 있다

어린 선수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오는 것은 큰 행운이에요. 14세~16세의 학생들에게는 이미 성공적인 선수가 되는 데 필요한 가능성이 50% 이상 준비되어 있어요. 코치는 그저 선수가 지닌 가능성이 '드러나게 도와주는 사람'이죠. 그러려면 그 선수에 대해 알아야 하고요.

 

저를 찾아온 학생들에게 제가 가진 경험과 지식을 앞세울 수도 있어요. '오 그래, 너는 내가 유명한 코치인 걸 알고 찾아온 거지? 내가 널 잘 키워줄게'라며 말이죠. 정말 위험한 거예요.

 

제가 그들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 지보다 제 앞의 학생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은 힘들어하는지…  즉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가야 해요. 제 시스템이나 훈련 방법,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3. 성공했을 때 변하지 않도록 걸어온 길을 기억하게 한다

저는 이텐에서 온 생애를 살았어요. 제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외의 큰 대회나 올림픽에 한 번도 같이 간 적이 없어요.

 

항상 현실감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해요.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죠. 제가 가르친 학생들이 큰 대회나 올림픽에 나간다고 해서 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필요는 전혀 없어요. 저는 그저 코치로서 할 일을 다 한 거죠. 학생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해요. 모든 성공, 올림픽 메달, 세계 기록… 이루어낸 성취를 가능케 한 그 뿌리를 잊지 말라고요.*

데이비드 루디샤는 지금도 이텐에서 브로콤과 훈련하면서 자신도 수년 전 참가했던, 브로콤이 운영하는 십 대 청소년들의 달리기 캠프에 함께 한다. 2011년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준비할 때, 브로콤은 일부러 루디샤가 성 패트릭 고등학교 학생들과 같이 훈련하도록 했다. (다큐멘터리 < Man on a Mission - Br O'Connell and the rise of Kenyan Athletics >  참고)

4. 훌륭한 코치는 훌륭한 요리사와 같다

요리사는 준비한 재료 이것저것을 알맞게 섞어서 최고의 조합을 통해 음식을 만들어 내요. 훌륭한 요리사는 모든 재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서 재료들 간 균형을 잘 맞추죠.

 

훌륭한 코치도 마찬가지예요. 한 선수가 가진 면면을 잘 파악한 후 그것을 알맞게 섞어서, 그 선수의 최고치를 이끌어 내죠. 선수의 재능에만 집중하기보다 그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면을 파악해야 해요.

5. 선수를 재능으로 보기 전에 사람으로 본다

선수를 구성하는 '재료'는 성격, 집중력, 헌신, 성공 또는 실패했을 때 평정심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등이라고 봐요. 동료나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후에 웬만큼 성공을 이루었을 때 어린 학생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달리기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그 동기는 무엇인지도 중요하죠.

 

물론 재능도 보지만, 그것 역시 선수의 한 부분으로 봅니다. 정말 훌륭한 선수는 달리기 재능에만 집중해서는 육성할 수 없어요. 그 선수를 만드는 전체를 봐야죠.

6. 선수가 훌륭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중점을 둔다

저는 어린 학생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평생 육상만 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하려고 해요. 더 좋은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고 그를 위한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죠. 제가 달리기나 재능에만 집중하지 않는 이유예요.

7. 실패했을 때 같이 있고 싶은 코치가 되는 것

선수가 승리했을 때 옆에서 같이 환호하고 응원하기는 너무도 쉬워요. 하지만 선수가 패배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패배의 순간에 있는 선수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코치로서 해야 할 역할은 이렇게나 많아요.

 

선수가 실패해도 그 옆에 있어줄 수 있는지, 선수가 실패했을 때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원하는지 등 그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어렵더라도 코치로서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8.  '재능'보다 '기질'을 본다

데이비드 루디샤가 계속 3등만 하면서도 도전하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 안에 무언가 있다는 걸 이 선수는 보는 듯싶은데, 나도 그걸 볼 수 있지 않을까?' 패배하면서도 계속 성공하는 루디샤의 모습에서, 루디샤만의 기질을 본 거죠.

9. '삶'을 위한 코칭

만약 제가 야망이 크고, 더 기술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선수들에게 성적 내기를 압박했으면… 더 큰 성공을 거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브라임 후세인부터 데이비드 루디샤까지, 제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선수들을 보면 모두 성공한 선수이면서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만나보면 알 거예요.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걸.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이텐에서 김성우 저자는 케냐 마라토너들과 함께 달렸습니다.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훈련 방식으로 뛰고, 그들의 삶을 묻고 듣고 기록했습니다. 수십 명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과 메이저 마라톤 우승자들의 스승, '챔피언들의 아버지' Brother Colm과도 인터뷰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