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Comment

김서경 저자의 프롤로그를 소개합니다. 본 글은 '가상현실의 미래를 보다 - VR for Change Summit 2017' 리포트의 첫 꼭지입니다. 전문이 실린 리포트는 9월 12일(화) 오후 6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팽이, 화성, 케이크

딱히 겹치는 게 없어 보이는 세 낱말을 한데 엮는 주제는 무엇일까?

 

답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이하 VR)이다. 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2010)>을 보았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조그만 팽이를 돌리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팽이가 쉼없이 돌아가면 꿈 속, 멈추면 현실이다. 즉 여러 차원으로 설계된 '꿈'을 오가는 와중에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아이템이다.

 

그럼 화성은? 영화 <토탈 리콜(1990)>에서, 주인공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화성이 등장하는 꿈에 시달리다 못해 기억을 조작해 주는 가상현실 서비스 업체인 리콜(Rekall)에 상담을 받으러 간다.

 

케이크는? 북미의 게임회사 밸브(Valve)가 제작한 게임 '포털(Portal)'에서, 주인공은 체리와 휘핑크림을 얹은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쫓아 가상의 3차원 실험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위에 언급한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체험하는 꿈, 기억, 실험실이라는 환경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시공간이다.

 

시와 소설,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꾸준히 다뤄져 온 상상의 시공간은 이제 첨단기술에 힘입어 실제 우리를 둘러싼 현실 못지않게 오감을 자극하며 생생한 체험을 이끌어내는 데 이르렀다. 부진한 기술력 탓에 한동안 정체되었던 VR분야는 2010년, 파머 럭키가 오큘러스 리프트를 디자인하고 다시 2014년 3월, 주커버그가 오큘러스 VR을 20억 달러에 구매하면서 시장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채 3년이 안 된 2017년,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업계를 선도하는 IT  회사가 VR에 주목한다. 하드웨어 업계의 오랜 강자였던 삼성, 소니도 마찬가지다. 현재 약 230여 개에 이르는 회사가 VR 관련 기술에 매달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위치한 시애틀에 자리한 워싱턴 주립대에서는, 올해 HCDE(Human Centered Design and Engineering) 석사과정 졸업작품으로 VR이 인기를 끌었다. 그중 몇몇은 심지어 밸브를 포함한 시애틀 근교에 위치한 IT 회사와 합작하여 진행한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한다
VR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는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낳는다
그럼, 그다음은?

현실과 착각할 정도로 강력한 유사-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VR/AR 체험에 필요한 기기 역시 계속 단가가 낮아져, 구글에서 내놓은 '카드보드(Cardboard)' 같은 경우 단돈 15달러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이 있고 VR 애플리케이션이 깔려 있다면 누구나 손쉽게 VR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일이다.

 

이제 그걸로 무얼 할 수 있는가? 

 

기술은 있다. 필요한 건 콘텐츠다. 많은 이들이 그 답을 모색 중이다. 올해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열린 게임 포 체인지(Game for Change)의 독립 세션인 VR 포 체인지 역시 답을 찾는 시도의 일부다.

VR 포 체인지 서밋(VR for Change Summit) 2017 &#169;김서경

게임 포 체인지의 세 가지 주제는 1. 헬스케어와 뉴로게이밍(Neurogaming), 2. 인권 및 사회문제, 3. 배움을 위한 게임이다.

 

이러한 주제와 맥을 같이하는 VR 포 체인지 서밋에는 하버드와 카네기 멜론, 스탠포드 등 유명 연구대학에서 근무하는 연구자와 미 정부 관계자, UX/UI 디자이너, 게임 개발자, 스타트업 CEO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헬스케어, 교육, 신경과학에서부터 이민자, 소수인종, 성소수자의 인권 등, 여러 다양한 분야의 이슈를 해결하는 데 VR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학회 기간 내내, 패널 토크나 발표와 관련하여 개발 중인 데모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스테이지도 열린다. 

 

게임 포 체인지 2017을 소개하는 영상 ⓒgameforchange.org

 

적용가능한 콘텐츠의 범위를 가늠할 때, VR은 대단히 학제적인 주제다. 먼저 VR의 핵심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컴퓨터공학이나 컴퓨터 그래픽스와 같은 분야가 있다. 인지과학, 인간공학,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이 있다.

 

이들 분야에서는 VR 내 환경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패턴 및 콘텐츠 활용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 VR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문가들만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가 따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때문에 이번 VR 포 체인지는, VR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앞으로 여러 다양한 분야들과 엮이며 폭을 넓혀갈지 가늠해볼 수 있는 스냅샷이기도 하다. 심리학 연구자로서 학계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이제 VR 내에서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며 정보를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연구하고자 하는 내게도 이번 서밋은 흥미로운 기회다. 언제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충분조건은 (유전에 의해서든 양육에 의해서든)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바로 그 점이라 믿어왔다.

 

우리는 고등한 수준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매일같이 나누며, 이러한 상호작용은 우리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현상이라 생각하니까. AI가 최후로 정복해야 할 영역이라 생각하니까. 고등한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배우고, 배운 바를 기록하고, 기록을 토대로 문명을 발전시켜 온 종은 인간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아직까지는.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존재라면 공간과도 상호작용할 수 있다. 허친스(1996)의 '분산된 인지(Distributed Cognition)'나「디자인과 인간 심리」의 저자 노만(1988)의 '행동유도성(Affordance)', 이시이(1997)의 '탠지블 빗(Tangible Bit)'과 같은 개념은 공간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몇몇 방식을 잘 설명해 준다.

 

우리의 몸은 우리 존재의 경계이며 그 경계에 공간이 잇닿아 있다. 인간의 정신은 유연하기 때문에 몸이 처한 공간에 훌륭하게 적응한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인지적이든 사회적이든, 처한 공간이 달라지면 우리의 경험도 달라진다. 최규석의 만화 '송곳'에 등장하는 인물인 구고신은 말했다. 선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고.

 

스탠포드 연구팀이 제작한 8분짜리 VR 영상에서는 노숙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일인칭 시점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다. ⓒVHIL

 

VR은 또 다른 시공간이다. 실재 위에 너울 치는 레이어다. 이제 그 레이어가 주는 감각은 실재만큼이나 강력해졌다. 기술 덕분이다.

 

이 새로운 '현실'은 우리의 몸이 처한 경계를 어디까지 밀어낼까? 우리는 언젠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까?

 

이때마다 늘 아서 클라크의 과학소설 「유년기의 끝」, 맨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현명한 오버로드가 가져온 황금시대의 끝, 아이들은 부모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등한 존재가 되어 먼 우주로 떠난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고 가능성을 끌어내는 존재로서의 공간, 실재가 아닌 공간, 그 공간에서 우리는 누구일까. 어떻게 달라져갈까.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다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이제 겨우 주목하기 시작한 것들. 이론의 역사가 이삼십여 년에 불과한 것들. "지금, 여기", 기술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가상현실의 미래를 보다 - VR for Change Summit 2017]

 

마크 주커버그는 페이스북 10개년 계획의 하나로 VR을 꼽았습니다. 구글과 아마존도 적극적으로 가상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게임 컨퍼런스 중 하나인 '2017 Games for Change Festival'에서 'VR for Change Summit 2017'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시애틀 워싱턴 주립대에서 HCI를 연구하는 김서경 저자가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