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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러시, 핀란드라는 빙산의 일각

슬러시, 핀란드라는 빙산의 일각

놀라운 것을 보시게 될 거예요

유럽 최북단 핀란드의 겨울은 혹독합니다. 오후 4시만 되어도 하늘은 깊은 밤처럼 암흑에 뒤덮힙니다. 거리는 흙과 눈이 뒤섞여 만들어진 '슬러시(slush)'로 진흙탕이 되어버립니다.  

 

슬러시는 영어로 '질척거리는 눈'을 뜻합니다. 얼음을 갈아 만든 슬러시 음료수와 비슷한 상태의 흙눈이 온 도로에 퍼져있다면 어떨까요. 이런 침울한 날씨 속에서 핀란드 청년들은 하늘을 향해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라고 외치며 거대한 행사를 만들었습니다. 행사에는 '슬러시(Slush)'라는 지극히 핀란드스러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핀란드 거리에 쌓여있는 슬러시 ⓒ박솔잎

"고프로(GoPro)는 서핑 중 탄생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고 하죠. 반면 핀란드에서 그럴 순 없습니다. '헬싱키 앞 바다에서 태양을 쬐며 서핑을 하다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대신 '밖이 너무 추워 집 안에 갇혀 있다가 멋진 걸 만들었습니다'라는 말이 통합니다. 리눅스(Linux)가 그렇게 발명되었고 핀란드 게임 산업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핀란드의 겨울은 날씨가 매우 춥고 해가 짧아 어둡습니다. 그 안에서 멋진 스타트업과 창업자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슬러시 정신입니다."
- 미끼 꾸우시(Miki Kuusi) 슬러시 전 대표의 강연 중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창업이란 단순히 용감한 개인이 가게나 공장을 차리는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스타트업, 앙트러프러너* 같은 개념도 낯설었지요. 
* 프랑스어 entre와 prendre가 합쳐진 단어(Entrepreneur)로, 비즈니스 분야를 비롯해 특정 영역에서 이전에 없던 혁신적인 가치 또는 활동을 만들어내고 책임지는 사람(출처: 앙트십코리아). - PUBLY

 

그러다 2011년 미국 CMU(Carnegie Mellon University) 실리콘밸리 캠퍼스로 석사 유학을 간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곳에서 스타트업은 단순히 용감한 개인의 성과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 문화, 투자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이 접목되어 발전하는 거대한 생태계였습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 경험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신기술과 디지털 문화를 어떻게 교육 현장에 녹여낼 수 있을지, 교실 너머까지 생태계를 확대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제주 넥슨컴퓨터박물관에서 신기술과 혁신 아이템을 전시와 교육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직간접적으로나마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서서히 뿌리내리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러던 2015년의 어느 날, 스타트업 지원 단체 스타트업 얼라이언스(Startup Alliance) 모임 테헤란로 커피클럽에서 핀란드에서 온 앙트러프러너 이동훈 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와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핀란드 대학에 편입해 학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핀란드와 미국을 오가며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었다고 했습니다. 커피클럽에서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만약 핀란드에 가시게 되면, 슬러시에 꼭 가보세요. 놀라운 것을 보시게 될 거예요."

 

어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실제로 1년 남짓 지나 저는 핀란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현지에 적응할 즈음, 이동훈 씨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슬러시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니 마침 자원봉사자 모집 공지가 보였습니다. 단순히 방문객으로 행사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강렬한 경험을 하고 싶은 마음에 지원서를 등록했습니다. 

 

슬러시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막연히 미국 유학 시절 다녀왔던,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 GDC(Game Developers Conference)나 CES(Consumer Electronics Show)를 떠올렸습니다. '당연히 긱(geek)스러운 분위기이겠지', '인구가 작은 나라니까 규모가 작겠지' 같은 짐작만 해볼 뿐이었습니다.

 

저는 슬러시 자원봉사자 지원 그룹에 배치됐습니다. 구성원은 총 8명으로 대부분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이었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이들과 행사 시작 몇 주 전부터 간간히 만나 친목을 쌓았고 자원봉사자를 위한 오리엔테이션 행사에도 참석했습니다. 
 

슬러시 개최 하루 전, 자원봉사자에게 티셔츠와 배지를 나누어주는 일을 비롯해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까 꼬꼬?(Mika koko, 사이즈가 무엇입니까)"라는 말을 반복하며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만났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20대 초중반의 청년이었습니다. 

 

그 주변에서 지침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들의 배지에는 크루(Crew)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저는 크루들이 고용된 행사 요원이고 자원봉사자들과 수직적인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 50시간 후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 준비가 한창이었던 D-1의 슬러시. ⓒ박솔잎

이렇게 젊은 친구들이 주도한다고?

2016년 11월 30일, 슬러시가 시작되었습니다. GDC 같은 행사로 여겼던 제 예상은 틀렸습니다. 

 

GDC는 세션부터 부스까지 모든 장소에 갈 수 있는 풀 패스와 업체 전시 공간만 볼 수 있는 패스 간의 가격 차이가 상당히 컸습니다. 또한 각각 독립적으로 공간이 운영됩니다.

 

슬러시 역시 스폰서, 투자자, 스타트업 관계자, 학생 등으로 나뉜 각 패스의 가격 차이가 컸습니다. 하지만 행사장 여기저기에서 키노트 발표, 토크 세션, 업체 부스 발표, B2B 미팅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어느 티켓을 사더라도 모든 부스와 발표, 세션 현장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또 있었습니다. 대형 업체들의 부스와 이벤트 공간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는 다수의 국내외 컨퍼런스나 박람회와 달리, 슬러시는 행사장의 가장 중심에 신생 스타트업 업체들의 부스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별도의 출입구 없이 오픈된 공간에서 세션이 열렸고, 세션을 보기 위해 움직이려면 무조건 중앙의 데모 공간(Demo Area)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스타트업 업체의 대면 접촉도를 늘리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동선 배치 같았습니다. 스탠딩 파티와 컨퍼런스 간 조화가 훌륭하게 이뤄졌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슬러시 행사장 지도. 신생 업체들의 부스가 중앙에 배치되고 대기업 전시 무대는 외곽 지역에 분포됐습니다. ⓒSlush

슬러시 내부 전경. 세션이 진행되는 무대와 미팅 공간, 업체 부스들이 탁 트인 공간에 함께 위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린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강연을 듣는데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Slush

물류창고에서 방금 가지고 온 듯한 나무 박스를 벤치와 책상으로 둔갑시킨 센스에도 감탄이 나왔습니다. 역사가 짧은 행사지만 다른 컨퍼런스에서는 보지 못했던 슬러시만의 독특한 색채가 무대, 업체 부스, 이정표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티셔츠를 나누어줄 때 만난 자원봉사자들도 행사를 즐기며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손에 커피나 물컵을 쥐고 업체 관계자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청년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피곤하면 자원봉사자용 휴식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었습니다. 

 

심지어 자원봉사자들의 스트레스와 건강을 전담하는 팀도 존재했습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무리하지 말고 그들을 찾으라'는 안내도 받았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잘 만든 행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원봉사 티셔츠를 입은 청년들에게 소위 갑질을 하며 무례하게 굴거나 명령을 내리는 관광객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기 단계 스타트업들의 발표 대회가 치루어진 피칭 스테이지(Pitching Stage). 무대는 물론이고 관람객 좌석까지 재활용된 나무를 사용한 모습이 눈에 띕니다. ⓒSlush

슬러시에서 이틀을 보내고 12월 1일 오후,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슬러시 애프터 파티(Slush After Party)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중 크루 배지를 단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기 직원이세요? 근무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굉장히 앳되어 보여서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청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저에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자원봉사자예요. 올해로 슬러시는 두 번째 참석이고요."

 

행사 기간 동안 이 '크루'의 활동 반경은 상당히 넓었습니다. 단순히 저희 그룹에 지침을 전달한 것을 넘어 중요한 결정도 내렸습니다. 자원봉사자 전용 공간의 비품 수량을 관리하고, 그룹원들의 동선을 체크해 어느 한 쪽에 사람이 몰리지는 않는지도 살폈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저희 그룹에 업무가 과도하게 몰리자 다른 그룹원들을 설득해 지원에 나서도록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딜 봐도 '책임자' 급이었습니다. 제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그는 오히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모르셨어요? 이 크루들 대부분 자원봉사자이고 다 우리 또래인데요. 그게 그렇게 놀라운 건가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슬러시 이사회, 핵심 멤버, 크루, 팀 리더, 그룹 리더와 일반 진행요원을 맡은 이들은 모두 대학생이거나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이다.
2. 풀타임으로 슬러시 행사 기획 및 준비에 동원되는 핵심 멤버 20여 명을 제외하면 모두 자원봉사자이다.
3. 대부분 핀란드 정부로부터 나오는 무상 등록금과 학생 대상 생활 지원금 등 여러 복지 제도 수혜자이다.
4. 핵심 멤버부터 일반 진행요원까지 모두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5. 헬싱키 시를 비롯해 핀란드 정부는 슬러시를 지원하지만 슬러시의 독립성을 존중한다.
6. 핀란드 기업들 또한 참가 업체 신분으로 행사에 임할 뿐 슬러시에 개입하지 않는다.
7. 슬러시는 알토이에스(Aaltoes) 커뮤니티라고 불리는, 핀란드 스타트업 핵심 생태계의 일부이다.

 

슬러시의 규모는 매우 컸습니다. 행사 중 선보인 각 세션은 미래라는 공통 키워드를 교육, 앙트러프러너십*, 투자 등 다양한 관점으로 풀어냈습니다.
* 앙트러프러너가 가져야 할 정신과 능력, 활동 등을 총칭. - PUBLY

 

무대 구성과 동선, 소품 활용에서도 슬러시만의 독특한 색채가 느껴졌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는 자원봉사자들은 수평적이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저는 아무 의심 없이 이 행사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지자체 또는 전문 업체를 컨트롤 타워로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태양 대신 찾아낸
핀란드 고유의 색채
슬러시
본 행사가 거의 끝나고 나서 이 행사의 진면목을 알게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 추억과 충격이 가시기 전에 슬러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저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2016년 12월 1일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파티가 시작되기 직전 촬영한 자원봉사자 단체 사진 ⓒSlush

슬러시 이면의 핀란드를 발견하다

슬러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이것이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슬러시는 알토이에스로 대표되는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내고 있는 흐름의 일부였습니다. 

 

핀란드에서 알토이에스와 그 계열 단체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단체 모두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핀란드 정부의 정책 성과라고만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슬러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가면서 느낀 점을 그린 그림 ⓒ박솔잎

매년 슬러시를 방문하는 해외 스타트업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슬러시는 상하이, 싱가포르, 도쿄에서도 열립니다. 2016년 3월 슬러시 도쿄와 10월 슬러시 상하이에 5천여 명이 각각 참가했습니다. 이들 해외 행사는 현지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여 진행됐습니다. 다만 슬러시의 기본 정신은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청년이 주도한다는 것

본문에선 슬러시를 매개로 만난 핀란드 스타트업 관계자 인터뷰 및 리서치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행사를 만든 핀란드 젊은이와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짚어보았습니다. 당연히 한국 사회와 비교되리라 예상합니다.

 

이 글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2016년 10월 31일 열린 슬러시 상하이(Slush Shanghai) ⓒSlush

#1 슬러시, 핀란드라는 빙산의 일각 마침.

독자 리뷰

현재까지 351명이 읽은 콘텐츠입니다

  • 김**

    슬러시에 대해 궁금했는데 정말 자세히 알게 되어 좋습니다. 최근 팟캐스트에서 슬러시 자원봉사자로 2년 일하고 지금은 슬러시에 풀타임으로 있는 분의 인터뷰도 들었었는데, 한번 꼭 가보고싶네요~

  • 전**

    슬러시 뿐 아니라 핀란드 스타트업 문화에 관한 내용이 매우 유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슬러시 2016: 미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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