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과의 인터뷰

들어가며 : 이 글은 PUBLY의 Women at KAIST 프로젝트 유료 인터뷰 콘텐츠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Women at KAIST는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가 '여성'을 키워드로 과학하는 여자 7명과 남자 6명의 삶, KAIST 과학자 13명의 경험과 고민을 이어 인터뷰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면 전길남 KAIST 공과대 전산학부 명예교수의 인터뷰 전문(全文)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유료 콘텐츠의 일부를 발췌한 이번 전길남 교수 편 외에 프로젝트 미리보기글은 PUBLY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 :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인터뷰이 : 전길남 KAIST 공과대 전산학부 명예교수 

 

인터뷰 일시 및 장소 : 

- 2016년 7월 21일, 8월 9일~11일 (KAIST 연구실)

- 2016년 8월 27일 (스카이프 온라인 인터뷰)

 

말하자면 그는 지구인이다. 그의 육체적 무대는 세계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결혼했으며, 한국에서 일하고 가르치다, 정년 이후 전 세계를 누비며 살고 있다. '코스모폴리탄'이나 '글로벌 시티즌'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60여 개 나라를 돌았다. 어디로, 왜 가는지 목적이 뚜렷한 존재. 

 

그는 지구인인 동시에 경계인이기도 하다. 경계인이란 이쪽 세계에도 속하고 저쪽 세계에도 속하는 사람이다. 또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랑객이다. 그의 자의식은 한국인이었지만, 그의 기준은 전지구적인 것이었고, 그의 언어 역시 그랬다.

 

그의 정신적 영토는 인류가 창조한 또 하나의 세상인, 사이버 스페이스였다. 1982년, 그가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의 컴퓨터를 연결하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열어젖힌 인터넷이라는 신세계는, 한국의 90년대와 2000년대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들었다. 지금 그는 전쟁과 내란과 가난에 시달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저개발국가에 인터넷을 보급하며, 다시 한 번 그런 기적을 꿈꾸고 있다. 

7월 21일, 전길남 KAIST 전산학부 명예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국 사회를 위해 탁월한 제자들을 길러내고자 헌신했던 젊은날을 회고하고 있다.ⓒ이진주

'한국 인터넷의 창시자'를 넘어 '아시아 인터넷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를 Women at KAIST 인터뷰이로 섭외했다. 마침 '한국 여성계와 문화운동계의 권위자'인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가 그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의 자세한 미니 인터뷰 내용은 최종 발행되는 유료 콘텐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UBLY

 

전길남 교수와의 인터뷰는 하루 한나절씩 꼬박 나흘에 걸친 것이었다. 그의 생활리듬에는 규칙이 있었고, 시간을 10분 단위로 나눠 썼다. 초안을 리뷰하기 위해 8월 말, 그의 출장지인 동경과 인터뷰어가 사는 제주 간 스카이프를 했다. 자녀들이 언급된 부분은 각자에게 이메일로 확인을 받았다. 정확하고 엄밀한 태도였다.

 

조한 교수는 전길남 교수의 인터뷰 초안을 읽고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화답했다. 나머지는 아이들을 놀리며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당신의 외손자와 나의 둘째가 또래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종종 끊어졌다. 그는 외손자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챙겼고 손수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었다. 나는 녹음하거나 받아치는 걸 곧 포기하고 그를 따라다녔다. 

잠재적 여성주의자의 탄생

인터뷰 질문
8. 여성이 과학/공학 분야를 공부하고 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여쭙습니다. 남성이시라면 동료 여학생이나 여교수님들께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여쭙습니다.
여자가 왜 이과를 가는지 같은 말을 들어보실 적 있으신지요?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으신 적은요? '유리천장'이나 '새는 파이프'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과 커리어의 양립이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관용어들인데요, 실제로 여성이라는 게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지 장벽이 되는지, 본인이 경험하거나 관찰하신 바를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9. 여자들끼리의 관계에 대해 여쭙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 그 담론이 통용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실제 경험한 여성들과의 관계는 어떠십니까? 

10.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의견을 여쭙습니다.
'엔지니어처럼 생긴 여자' 논쟁이 났을 때, 일부러 섹시한 옷에 가운을 걸친 사진을 올린다거나 하는 저항운동이 있었어요. 여성성이나 섹시함을 극대화해 남성들의 호감을 사는 '여왕벌' 타입의 여자들도 있지만, 남자들에게 직업적으로/학문적으로 진지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외모를 망치는 여자도 많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쪽이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성주의나 그런 건 나한테 특별하게 생각된 건 아니었던 거 같아요. 미국식으로 하면 내가 그렇게 특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싶기도 하고요.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차별에는 처벌이 따르니까요. 선진국이란 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기회를 많이 줘서 선진국인 것이지요."

학문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여자였다. 전길남 교수 주위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환경이었다. 

"우리 IT/전자 분야에 엄청난 임팩트를 준 책을 쓴 공저자 중 한 명이 여자였어요. 나중에 미시간대 부총장까지 지낸 대단한 사람이었죠.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하도 많아서 자연스러웠어요.

 

물론 '남자만큼 많아요?' 이렇게 묻는다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전 교수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우연히 역사적인 학생운동에 휘말리면서 서울대와 동경대의 여학생들에게 정신적 빚을 졌다.* 그리고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차별적인 시각 없이 탁월한 여성 연구자들을 많이 만났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최종 발행되는 유료 콘텐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UBLY

"우리 집사람(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을 포함해서 여자들도 얼마 정도는 다들 학문에 데디케이트 된 사람들이 미국에 모였어요.

 

'나는 이거 해야 한다', '사회를 위해 이런 학문을 해야 한다' 그랬죠. 물론 한국이란 사회에선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KAIST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걸 달성하는 거,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중요했죠. 그러려고 정부에서 예산도 혜택도 많이 받았는데.

 

거기에선 '남자예요? 여자예요?' 하는 질문이 별로 관계가 없었어요. 그보다는 '할 수 있어요? 없어요?'가 훨씬 중요한 질문이었어요. 50퍼센트의 가능성을 버릴 필요가 없는 거였죠."

그가 지켜본 KAIST 여학생들은 탁월했다.

"KAIST 시스템이 서울대학교와는 좀 다른 거 같아요. 서울대학교는 할 수 없이 보수적인 구조를 갖게 되는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여기는 새로 만든 데고, 목적이 분명하니까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학위하고 좋은 논문 내면 되는 거였어요. 실력으로 증명해버리면 끝나요. 남자니 여자니 하는 팩터는 별로 끼어들 틈이 없었죠.

 

문수복 박사(KAIST 전산학과 교수)도 그렇고, 문 박사 1호 제자였다가 KAIST 문화대학원 교수로 온 차미영 박사도 그렇고. 공부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자기가 여자라 고민할 여유가 없어 보였어요. 내가 보기엔 프로페셔널한 차원의 고민을 하는 것 같았는데. 적어도 우리 과에서는 '여자니까 구조적으로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막는 일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얘들은 미국에 있었으면 하버드나 MIT나 스탠포드에 갔으면 좋았을 아이들, 그러니까 천재들이예요. 과학고 탑 그런 친구들이 KAIST에 왔으니까요. 여학생들도 과학고 투탑이 나란히 진학해서 하나는 전산과 오고, 하나는 전자과 가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우리가 그 친구들에게 그만큼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우리는 항상 고민해왔던 거 같아요."

전설적인 과학고 투탑 여학생 중 전자과에 갔다는 한 명은 윤송이, 훗날 엔씨소프트 사장이 됐다. 전산과에 왔다는 정재연 박사는 MS에서 일하고 있단다. KAIST 교수로 초빙했었지만, 유대인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더라고 했다.

"MIT 미디어랩에 패티 매(Pattie Maes)라는 연구자가 있어요.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림이 반응하는 것 같은 굉장한 상호작용 연구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어요.

 

이미 미국에선 컴퓨터 사이언스 분야의 여성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었고, 엔트리 레벨이 아니라 리더 레벨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애초에 하이어라키(위계)가 있는 분야가 아니고 호리젠탈한 학문이니까요. 

 

우리도 이제 리더 레벨의 여성 연구자를 찾아야 해요. 우리 분야에서는 문수복 박사가 상대적으로 가까워요. 한국 사람으로서 세계적 수준으로 꼽을 만한 여성 학자지요. 내가 알기로는 첫 번째 케이스예요. 그런데 어찌 보면 문수복 박사가 성공하는 건 당연해요. 학부는 서울대를 나왔고, 좋은 교수한테 유학 가서 톱 논문을 썼어요.

 

좀 더 젊은 그룹에선 류석영 교수도 잘 관찰해 보세요. 류석영 박사는 학부부터 박사까지 KAIST 출신이에요. KAIST가 진짜 성공했다는 걸 증명하려면 우리가 키워낸 박사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덩달아 나까지 어깨가 무거워졌다. 실제로 이런 주문을 받는 제자이자 후배, 동료 여교수들의 부담이 짐작이 됐다. 인터뷰 원고를 편집하던 8월 30일, 인터뷰어의 연락을 받아 초안을 읽은 문수복 KAIST 전산학과 교수는 '전 박사님께서 늘 들려주시던 응원과 기대와 부담이 섞인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고 말했다. 

 

"컴퓨터 사이언스가 발달하고 이렇게 일상적인 것이 되면서, 여학생들의 관심분야나 연구방향이 결국 맞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애초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연구주제들을 발굴하고 좀 더 친화적이고 관계지향적인 연구들을 하더라고요.

 

연구상에서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차이가 없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사람과 컴퓨터의 관계를 예컨대 '아기엄마' 같은 느낌으로 접근하는 거죠. 그건 '아기아빠'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에요. 비교적 더 친근하죠."

전 교수는 여성성이나 남성성의 차이를 애써 무화시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여성성을 강조하는 옷차림이나 외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여자로서가 아니라, 학회 참석자로서 예의를 갖추는 건 강조해요.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잘 차려 입어라.'

'이번 학회에는 갈라가 있다. 드레스를 준비하라.'

그런 식으로 힌트는 주죠. 그건 그 사람의 이미지를 위해서도 중요하니까요.

 

평소 연구할 때는 슬리퍼만 끌지 않으면 괜찮아요. 슬리퍼는 잘 때만 신는 건데, 잘 모르더라고요."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인터뷰 질문
11. 페미니즘에 대해 여쭙습니다.
수업이든 학회든 동아리든 선배든 책으로든, 여성주의나 양성평등적 시각을 접하신 바 있으셨는지요? 그것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눠 주실 수 있으신지요? 스토킹이나 성희롱 등의 문제를 겪은 바 있으십니까? 겪었다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니면 해결하지 못했는지, 어렵지만 말씀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요?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서도 의견 들려주세요.

그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말로 분류되거나 범주화되는 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성주의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라는 거였다. 당신의 관심사는 오직 "여성이든, 인종이든, 그 속한 집단을 대표하는 능력 있는 리더가 있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었다고 했다. 

 

당신 자신은 물론, 한국 문화운동과 여성운동계의 권위자로 추앙받는 부인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 대해서도 그랬다. "인류학자로서 흥미로운 주제인 여성학을 우연히 연구했을 뿐"이라는 거였다. 애초 나의 가설은 "페미니스트 아내와 살다 보니 나 역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거였는데, 그런 고백을 끌어내려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조한 교수의 입을 통해 이 부분은 뒤에서 좀 더 들어보기로 하자.

 

경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관찰력이다. 경계를 넘나들며 이쪽과 저쪽을 관찰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해 입장을 정하는 일은, 어쩌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당신 마음속까지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수영을 하면서 (내가 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생각해 봤어요. 내가 일본에서 쭉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미국 가면서 가치 판단 기준을 완전히 바꿔야 했던 거죠. 미국에서 또 한국에 올 때 가치 판단 기준을 또 바꿔야 되는 거고.

 

내가 다녀본 나라가 60여 개 국이고, 그 중 인터넷을 도와주러 가는 나라가 50여 개국인데, 그 나라들에선 미국의 기준, 한국의 기준이 다 소용없는 일이예요. 그럼 나 같이 과학기술 하는 사람은 생각하게 되죠. 오케이, 그럼 합리적으로 하지, 그게 나한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KAIST의 여학생, 여교수 문제도 그런 거예요. 여성 문제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 건가, 결국엔 합리적으로 하는 게 제일 간단한 거죠.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내가 생활하고 살기 위해서는 결국 그렇게밖에 하는 거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자연스런 거고, 그렇지 않고 이중 삼중으로 스탠다드 만들다 보면 결국엔 안 되는 거죠."

결국 성별이나 국적이나 인종을 떠나 실력만을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기준이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길남 교수 자신이 겪었던 '마이너' 체험이 있었다.

"페어니스(Fairness)의 문제,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문제에 내가 굉장히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살았잖아요.* 자동적으로 그 사회에선 차별이 있었던 거고, 굉장히 차별에 예민해지는 거죠. 또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는 거기선 또 서양 사람과 나머지의 차별이 있었던 거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한국에 오니까, 또 아시아에 가니까, 공평의 문제에 예민하다고 해야 하나요, 신경 쓴다고 해야 하나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동일한 스탠다드를 가져야 하는 과학기술자로서의 합리성, 그리고 재일교포로서나 미국의 동양인 유학생으로서 차별을 겪은 경험을 합치면, 나같이 행동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결론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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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인터넷을 보급하는 사업을 하면서, "최소한 여성 엔지니어 한 사람은 위원회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내전과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첨단 분야를 공부하고, 영어도 잘하면서, 해외 학술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성을 찾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간신히 한 사람을 찾아 기쁘다고 했다. 

 

그 여성 엔지니어에게는 전 교수가 아니었으면 갖기 어려운 기회였을 게다. 어쩌면 개화기 선교사들이 우리 사회에서 했던 일을 그는 하고 있었다. 신과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말이다.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도움을 주는 것, 나는 그런 '퍼실리에이터(촉진자)'의 역할에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안 좋은 환경에 있어도 기회만 제대로 주면 그 상황을 돌파할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그런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을까에 예민해요." 

물론 기회를 붙잡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엔지니어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실망시킬 수도 있다.

"그건 여자라서가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가 있는 것이죠."  

그가 찾는 건 '슈퍼스타'였다. 슈퍼스타란 그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을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스트 인 더 월드'. 그는 실력을 신봉했다. 오직 능력만을 믿었다. 아마도 그 자신이 여러 차별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여성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굉장히 긍정적인 심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넷 환경이 거의 백지에 가까운 나라에서 인터넷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 그 영역에서 또 여성이 활동하는 것, 학교에 가지 못하는 여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부를 하는 것. 여러 가지로 좋은 임팩트를 줄 거예요."

공평주의자의 동반자, 인류학자의 시선

8월 27일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제주도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인터뷰 중 손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진주

'한국 여성계와 문화운동계의 권위자' 조한혜정 교수가 보는 남편 전길남 교수는, 여성주의적인 측면에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나는 그 사람이 4.19 혁명 시위 때 사망한 서울대 여학생을 참배*했다는 거 전혀 몰랐어요. 전 박사 마음에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국내외 여성들에게 그런 기회를 줬는지도 전혀 몰랐어요.

 

그 사람도 얘기하지 않았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고요. 인터뷰 초안을 읽고서야 처음 알았는데, 정말 놀라고 재미있었어요. 괴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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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동반자로 살아온 아내만이 아니라, 어쩌면 전 박사 본인조차 몰랐던 일이었다.

"글쎄, 그렇죠. 그건 정신분석의 영역이니까요. 정신분석을 한다고 해서 다 알아지나요. 잠재된 건데.

 

그런데 그걸 의식하기 전에도 전 박사는 전혀 여성차별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 점은 높이 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여장부이신 덕분에, 자식을 싸고돌면서 왕자로 키우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합리적인 사람이 됐고,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존중하고, 취약한 자리임에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 커요. 편을 들게 되면 늘 약자의 편을 들었어요."

조한 교수가 보기에 전 박사는 평등주의, 공평주의자이다. '불평등은 나쁘다'는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불평등이 사회 발전에 이롭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믿는 점에서 그렇다고 한다. 합리적인 사유를 한다면 불평등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여성에 대해서도, 장애인에 대해서도, 전라도 사람에 대해서도, 다문화가정에 대해서도, 북한이탈주민에 대해서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엘리티스트인가 하면 그렇게만은 또 볼 수가 없어요. 

 

엘리트로 클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기회를 주지 않아서 못 키우는 걸 죄라고 생각했어요. 직무유기라고요.

 

여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공평주의자예요."  

 

* 인터뷰 질문 8, 9, 10, 11번에 대한 전길남 교수의 답변과 조한혜정 교수의 미니 인터뷰 등 인터뷰 전문(全文)은 유료콘텐츠를 통해 발행됩니다. -PUBLY

 

[Women at KAIST]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의 본격 인터뷰 시리즈

 

과학하는 여자 7명과 남자 6명, KAIST 교수와 학생 등 구성원 13명의 삶을 '여성'이란 키워드로 인터뷰한 콘텐츠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