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의 도쿄

5월 6일부터 5월 11일까지 황금 연휴 기간을 걸쳐 일본 도쿄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출국 일주일 전, 사무실에 제 이름으로 책 한 권이 배송되었습니다. 주문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알고 보니 박소령 대표가 일본 여행을 잘 다녀오라며 선물해준 것이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임경선의 도쿄」, 부제는 '나만 알고 싶은 도쿄여행'. 두께도, 촉감도, 한 권의 예쁜 공책 같은 이 여행 에세이는 분홍빛 벚꽃이 한아름 그려진 커버 이미지가 도쿄여행을 앞 둔 여행자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합니다.

 

뒷면에 적힌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요즘 들어 물리적인 양과 가격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지라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책을 훑어보았습니다.

「임경선의 도쿄」 in 도쿄

첫 페이지를 넘기니 간단한 작가 소개와 한 페이지짜리 서문이 보입니다. 사실 임경선 작가의 이름은 서점 관련 일을 하며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책은 「태도에 관하여」를 드문드문 읽어본 경험만 있을 뿐, 이렇게 한 권을 오롯이 읽어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에 적혀있는 이 문장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아는 가게, 레스토랑, 명소보다는 가격 대비 성능 즉 가성비와 그 이상의 추가적 가치가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나의 예민함과 덕후력을 동원해 편애해 마지않는 장소들을 골랐다."
- p.1 

 

저의 여행 스타일 역시 누구나 아는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는 것보다는 거리의 풍경,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 건물의 색감, 가게 안의 전등 모양과 같은 것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대중적이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을 내세운 이 책의 첫인상이 좋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은 나리타로 가는 비행기 안. 약 2시간 남짓 되는 비행 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꼭꼭 씹어 먹기에 충분했던 이 책은 여행의 시작을 함께하는 에피타이저가 되어주었습니다. 임경선 작가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소들과 그녀의 발자취가 담긴 여행록을 보고 나니 일본에서의 5박 6일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졌지요.

 

다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여행 전 에피타이저로 맛본 것일 뿐 이 책에서 권하는 장소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니진 않았습니다. 물론 책에서 소개한 대부분의 곳들이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들이었지만 여행을 다닐 때 계획을 세우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저는 저대로 '나만의 도쿄 여행'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첫 기차 여행을 함께 떠난, 오랜만에 보는 음료수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길 닿는 대로 떠난 5박 6일간의 무계획 여행은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틀은 도쿄가 아닌 군마현의 키류라는 한적한 도시에 머물렀고, 나머지 3박 4일은 혼자만의 도쿄 여행을 즐겼습니다.

나의 동경

5박 6일 동안 다양한 곳을 들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주쿠 마루이 백화점 별관(MARUI ANNEX) 지하 1층에 위치한 '브루클린 팔러(Brooklyn Parlor)'라는 곳입니다. 이곳 역시 계획에 있던 곳이 아닌, 우연히 들른 곳 중 하나였지요.

신주쿠 '브루클린 팔러(Brooklyn Parlor)' 입구

브루클린 팔러는 상호명 아래에 적혀있는 music, cafe, books, eats, bar가 어느 것 하나 빠짐 없이 잘 어우러진 공간이었습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북카페도 아닌, 캐쥬얼 레스토랑도 아닌, 바도 아닌, 그러나 북카페 같은, 캐쥬얼 레스토랑 같은, 바 같은 느낌이 났습니다.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자 마자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춰 고개가 절로 까딱거려집니다. 런치메뉴인 참치 파스타와 크랜베리 쥬스를 한 잔 시키고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공간과 사람들을 구경하다보니 음식이 나왔습니다.

참치 파스타와 크랜베리 쥬스

주린 배를 적당히 채운 뒤, 책들이 진열된 한 쪽 벽으로 향했습니다. 참고로 일본어는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읽고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 책을 읽으러 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들이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 외국인이자 여행자의 눈으로 구경하러 갔을 뿐입니다.

 

진열된 책들은 자리에 가져가서 읽을 수 있었지만, 모두 판매용이기 때문에 제자리에 가져다 놔야 합니다. 어떤 책들은 샘플 한 권과 비닐에 쌓인 여러 권이 있기도 했고, 오직 한 권만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

한 쪽 벽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

우리나라 주요 베스트셀러 도서인 소설, 자기계발, 에세이, 경영/경제, 인문 등의 책 보다는 문화, 예술, 여행, 사진 류의 책들이 많이 비치되어 있어 외국인인 저 역시 볼만한 책들이 꽤 있었습니다. 사고 싶은 책들도 있었지요.

 

결국 제가 고른 책은 고양이 사진집 한 권과 명화를 고양이 그림으로 바꾼 그림책 한 권. 공교롭게도 두 권 모두 고양이 관련 책이네요. 사실 몇 권 더 사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두 권만 구매했습니다.

제가 산 고양이 그림책, Shu Yamamoto의 「CAT ART Collection」

이번엔 런치타임에 갔지만, 다음에 도쿄에 올 일이 또 있다면 그때는 밤 시간 대에 와서 술도 한 잔 하며 바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습니다. 비치된 팜플렛을 보니 저녁 시간 대엔 매주 1회씩 특정 DJ가 와서 음악을 틀어주는 것 같았거든요.

서로 다른 도쿄역을 마주하다

「임경선의 도쿄」에서 가장 처음 다룬 곳은 도쿄역입니다. 마침 일본에 사는 지인(2013년 일본 여행 때 사귄 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인)과 도쿄역에서 만나기로 하여 임경선 작가가 말한 도쿄역에 가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본 도쿄역은 없었습니다. 책에 있는 도쿄역의 사진은 서울역과 비슷하게 생긴 역이었는데, 제 눈 앞에 보인 도쿄역은 엄청나게 높은 빌딩이었던 것입니다.

도쿄역을 나와 마주한 높은 빌딩

일본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 사진 속 도쿄역은 반대편 출구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임경선의 도쿄」 속 도쿄역을 찾아 갔습니다. 그제서야 임경선 작가가 본 도쿄역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책 속에서 본 도쿄역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곳에서 다른 도쿄역의 모습을 본 임경선 작가와 저처럼, 여행이 여행자에게 주는 풍경과 가치와 경험은 떨어지는 벚꽃잎들처럼 모두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경선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쨌거나 도쿄는 자신의 취향대로 탐험하더라도 충분히 여행할 만할 가치가 있는 도시다. 모쪼록 만족스러운 도쿄 여행이 되길 바란다.
- p.1

 

'도쿄'와 '동경'이 같은 뜻이지만 다르게 읽히듯이, 저 역시 임경선 작가와 같은 곳을 갔지만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도쿄 여행뿐 아니라 모든 여행에 통용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저는 이번 여행에서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의 힘'을 느꼈습니다. 대단한 것, 대단한 장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소소한 것, 평범한 장소, 일상적인 사람들 일지라도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고 소중하게 보입니다.

 

예컨대, 서울 지하철에서는 그냥 지나쳤을 지하철 안의 광고를 보며 '적재적소'에 위치한 잘 만든 광고라고 생각한다거나,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는데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는 일본 아저씨를 보며 '신호등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 동질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이죠.

지하철 손잡이 앞, 겨드랑이 땀 나는 것에 대해 상담 받으라는 광고.

지금 보고 있는 소소한 것들도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사소한 것들도 '여행'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특별한 것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곳'이 아닐까요.

 

5박 6일 간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 사진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곳과 잠시 머무는 모든 곳에서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기른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조금 더 특별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