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Comment 

일주일간 무대에 오르는 연사만 250명, 총인원 1만 명이 참석하는 행사. 한국에선 잘 모르지만 벌써 12회째 열리고 있는 노르웨이 최대 테크 페스티벌 '오슬로 이노베이션 위크(OIW)'입니다. 중앙일보 이경희 기자가 직접 취재하고 쓴 'NORWAY WAY, 지속가능성에 주목하다 - OIW 2017' 리포트의 첫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전문이 실린 리포트는 1월 25일(목) 오후 5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상단 이미지 ©Christian T Joergensen/EUP-Berlin GbR

에스토니아의 '제로 뷰로크라시'

(중략) 오슬로 이노베이션 위크(Oslo Innovation Week,이하 OIW)에 참석하기 전에 가장 관심이 갔던 행사는 에스토니아의 원 데이 세미나였습니다. 에스토니아는 한국, 영국, 이스라엘, 뉴질랜드와 함께 Digital-5*의 회원으로, 전자 정부를 구축하고 있는 국가로 유명합니다. 또, 에스토니아는 Digital-5와는 별도로 노르웨이와 함께 Digital-2라는 이름으로 전자 정부와 관련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 2014년 12월 디지털에 앞선 5개 국가가 결성한 정부 간 조직. 개방형 표준과 오픈소스로 전자 정부를 더욱 효율화한다는 목표 아래 모였다.

 

에스토니아는 결혼과 이혼, 주택구입만 빼고는 모든 행정절차가 온라인으로 가능한, 지구에서 전자 정부(e-에스토니아)가 가장 발달한 국가입니다. 무려 국민의 98%가 디지털 ID를 갖고 있습니다. 헬스케어 분야도 선진적인 시스템이라 눈에 띄는데요. 환자의 정보를 각급 병원이 공유해 불필요한 재검사 없이 진단과 치료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도 선뜻 시행하지 못하는 전자 투표도 인구의 30% 정도가 활용했습니다.

 

세미나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제로 뷰로크라시(Zero Bureaucracy)'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부 관료의 입에서 '관료제 제로'라는 말이 반복되는 게 신기했습니다. 199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별다른 통치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택한 수단,
고효율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방편으로 전자 정부를
자연스레 택한 것이죠

전자 정부가 가능했던 또다른 배경에는 블록체인이 있습니다. 비트코인의 급등세로 한국에선 최근에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 블록체인 기술을 에스토니아는 이미 2008년에 도입해 정보 보안에 대비했습니다. 국민들이 민감해하는 디지털 정보 관리 이슈에 신기술로 대응함으로써 전자 정부에 대한 신뢰를 쌓기 위해서입니다.

'e-ESTONIA - explore the most advanced digital society' 세션 ©Christian T Joergensen/EUP-Berlin GbR

기술이 뒷받침한 '디지털 리더십'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산 덕분일까요.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자칫 민감할 수 있는 건강 데이터도 병원 간에 공유가 가능하도록 허용한다고 합니다. 그 편이 훨씬 편리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HIV 바이러스 감염자 등을 제외하곤 대개 정보 공유를 선택합니다. 건강 정보를 기관이 공유하도록 하는 건 정부는 물론 타인에 대한 믿음 없이는 힘든 결정일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에스토니아는 국경 내 전자 정부에 그치지 않고, e-레지던시(e-residency)라는 디지털 시민 제도를 통해 국경 없는 전자 정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창업하기 어려운 나라에 사는 이들에겐 에스토니아의 e-레지던시가 피난처가 됩니다. 그들이 에스토니아의 진짜 시민이 되는 건 아니지만, 디지털 정부의 서비스를 활용하면 EU 시장에 진출할 길이 열리게 됩니다. 현재 알리바바의 마윈이 바로 이 e-레지던시 기술을 지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나라 정부가 아주 큰 나라의 글로벌 기업가와 만나 디지털 국경을 넓히고 있는 셈입니다.

 

OIW 현장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이야기

노르웨이까지 왔는데 노르웨이 이야기를 빠뜨릴 순 없다는 생각에 '디지털 다이빙 마스크와 파이오니어 해저 드론으로 바다를 탐험하다' 세션을 찜했습니다. 해양 분야에서 이루어진 혁신을 다루는 세션이었죠. 특히 해저 드론을 만든 스타트업 블루아이 로보틱스(Blueye Robotics)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블루아이 로보틱스의 공동 창업자이자 유명 메이커(maker)*이기도 한 크리스틴 스파이튼은 노르웨이 과학기술대학교 출신의 여성입니다. 보드를 타고 서핑과 세일링을 즐기는 것이 취미라고 하더군요.

* DIY 정신을 이어받아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making)을 하는 이를 가리킨다.

'Explore the ocean through a digital diving mask and the Pioneer underwater drone' 세션 ©Christian T Joergensen/EUP-Berlin GbR

해저 드론 '블루아이 파이오니어'에는 수심 150m 악조건에서도 촬영할 수 있는 고화질(HD) 카메라가 장착돼 있습니다. 이용자는 드론이 무선 전송한 해저 영상을 선상에서 스마트폰으로 보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드론에 여러 가지 센서를 장착해 각종 IoT 데이터도 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기기는 인터뷰 당시 대당 3,550달러(약 380만 원, 현재는 대당 6,000달러)의 할인가로 300대 이상 예약이 된 판매된 상태였습니다.

스파이튼은 레저용 드론을 만든 이유에 대해 "해양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바다 환경이 점점 파괴되는 데 문제의식을 느껴 드론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스파이튼은 사람들이 바닷속 모습을 보며 바다를 더욱 사랑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수온과 깊이 등의 각종 데이터를 수집해 해양 환경의 변화를 모니터링하겠다는 계획도 밝혔습니다. 이처럼 OIW에선 바다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갖고 있는 젊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관련 영상: <Presenting the Blueye Pioneer Underwater Drone> ©Blueye Robotics

 

미리 찜해두지 못한, OIW 현장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연사 소개 팸플릿에는 '농화학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고민한다'라고만 돼 있었던 야라 인터내셔널(Yara International)이 그 예입니다. 노르웨이 기업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 소개만 가지고는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는데요. OIW 공식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이 회사 관계자가 간단히 브리핑하는 걸 보고는 '아차!' 싶었습니다.

 

야라 인터내셔널이 바로 자율항해 전기 컨테이너선을 개발해 '바다의 테슬라'라 불리는 노르웨이 토종 기업이자 유명한 글로벌 기업이었던 거죠. 하마터면 노르웨이식 혁신의 상징과도 같은 회사의 발표를 놓칠 뻔했습니다.

OIW가 개최된 장소 중 하나인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 &#169;Christian T Joergensen/EUP-Berlin GbR

이처럼 OIW에서는 광범위하다 싶을 만큼의 다양한 주제가 도시 곳곳의 크고 작은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논의됐습니다. 공간 자체가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250명의 연사 중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를 선택해 쫓아다니는 일 자체도 고되다 느꼈습니다. 행사 취재 전에는 에스토니아처럼 노르웨이 이외의 국가 출신 연사에 흥미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취재가 진행될수록 이 행사를 주최한 노르웨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OIW를 주최한 건 오슬로시 정부고, 주관한 건 오슬로 비즈니스 리전이라는 정부 산하 기관입니다. 우리로 치면 재단이나 진흥원에 가깝습니다. 정부기관 외에도 또 다른 주최 측은 '디지털 노르웨이'였습니다. 이는 야라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노르웨이 대표 기업이 포함된 노르웨이의 디지털 혁신을 위한 민관 협업 기구입니다. 디지털 노르웨이는 2017년 처음으로 OIW에 등장해 공식 컨퍼런스에서 발족 선언을 했습니다.

 

OIW에서 만난 오슬로시 혹은 디지털 노르웨이 측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업과 기관이 만나 디지털 시너지를 내도록 돕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시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OIW를 꾸려온 것도 그러한 소명감의 연장선일 겁니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이 정부, 이 나라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전하겠습니다.

 

[NORWAY WAY, 지속가능성에 주목하다 - OIW 2017]

 

'오슬로 이노베이션 위크(OIW)'에서 연사들의 강연이나 기술 시연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노르웨이 정부와 모든 참가자가 기술의 철학적 가치를 진지하게 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인간과 환경, 미래에 대한 책임 의식, 양성평등이 구현된 노르웨이식 정부 주도형 테크 페스티벌. 아시아 언론으로는 유일하게 취재한 중앙일보 이경희 기자의 경험담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