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경험이 없는 새로운 일에 뛰어들 때 가장 어려운 건 무엇일까? 바로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물어볼 '선배'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국제학을 전공하다가 우연히 들은 암실 수업을 통해 갑자기 사진의 길로 뛰어들었다. 전공 때문인지 주변 사람 대부분은 대기업 취업 준비 중이거나,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거나, 외교 아카데미에 다니는 사람뿐이었다. 사진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겼을 때 가르쳐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다가 (당시의 내 기준에서) 드디어 전시할 만한 작업물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나 하다가 동네에서 함께 술을 마신 적 있는 영미문학 잡지사 기획자에게 연락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분에게 '내 사진을 전시하고 싶은데, 기성 작가들은 어떤 경로로 이를 진행하는지 궁금해요', '예산은 어느 정도 필요한가요? 저는 돈이 없는데…'에서부터 지금으로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기본적인 질문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때 내가 열고자 하는 전시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 사진을 시작하며 자취를 시작했던 우사단 마을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싶다.
  • 사진 속에 우사단 사람들의 무심한 듯 따뜻한 일화를 담고 싶다.
  • 이들은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생겨난 상처를 감싸 주고,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준 사람들이며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 혹은 노인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눈을 휘둥그레, 입은 "오"하며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설득하기 위해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흥미롭게 듣는 그의 반응에 뭔가 잘 되고 있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잔뜩 긴장하며 상대방의 첫 마디를 기다렸다.

아이디어 좋은데? 내가 기획서를 써서 여기저기 제출해볼테니 조금만 기다려봐.

이때 '기획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그 기획서라는 건 무엇일까?', '그 안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길래, 전시 장소와 전시 자금을 후원받을 수 있다는 걸까?'

 

*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인 저자가 찍고 느낀 우사단 사람들 이야기 ⓒHankyorehTV

 

10일 정도 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왠지 모를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는 특이한 촉이 있는데, 전화벨 소리와 느낌만으로도 내용이 희소식인지 비보인지 직감할 수 있다.)

수민아, 기획서 통과됐다! 전시 손님들께 나눠드릴 무료 쌀이랑, 무료 당뇨병 시험 진행해주실 S병원 간호사 봉사팀이랑, S병원 지원금 300만 원 후원 결정됐으니까, 이제 전시 준비해!

나는 "야호!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그길로 쏜살같이 충무로 암실로 뛰어가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기획서라는 마법

불가사의한 그 기획서 덕분에 첫 전시는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한 번 기획서의 마법을 본 이상,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출 수 없었다. 그분의 그 은혜로운 기획서를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지만, 그 후로 나는 나만의 기획서를 쓰기 시작했다.

 

전시를 보러 오는 관객에게 나눠줄 주류 협찬을 요청하는 기획서부터, 태평양 항해를 위한 카메라 지원과 프로젝트 전액 후원을 위한 기획서까지 종류와 범위도 다양했다. 그 후에는 나만의 요트로 태평양을 건너는 프로젝트 지원금을 얻기 위해 브랜드에 보낼 기획서를 썼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내 기획서는 여러 모양을 거치고 거쳐 점점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기획서와 함께한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면 나조차도 신기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비전공자가 스트리트 포토그래퍼가 됐고, 사진 전공자에게 "어떻게 후원을 받아 전시했냐"고 도리어 질문을 받게 되고, 게다가 나만의 요트를 가진 사람이 되다니!

 

기획서를 들고 브랜드를 찾아다닐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자 비법은 '목적의식이 뚜렷하다'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한 번 하고 싶다고 결심하면 나는 종일 그것만 바라보고, 모든 생활 패턴이 그 목표를 향한다.

 

나는 한 번 마음먹으면 친구들과의 대화할 때에도, 과외 학생과 영어를 하면서도, 잠에 들기 전에 어두운 천장을 보면서도 '내일은 어떻게 그 목표를 이루는 데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비록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일지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더라도, 내가 혼자서 팀원 열 명의 일을 해야 하더라도 말이다.

©임수민영국의 위대한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은 배를 끌고 남극을 횡단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다. 섀클턴의 모험 이야기와 아름다운 흑백사진들을 좋아해 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가 마지막 남극 횡단의 후원금을 얻기 위해 1년 이상을 정부 관계자와 과학자를 만나 설득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었던 시기는 하필 나만의 요트를 사기 위한 프로젝트 후원 제안에 연달아 거절 메시지를 받고 회의를 느낄 때였다. 50여개 브랜드에 기획서를 보내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억지스러운 것은 아닐까?', '내가 계획한 모험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위대하지 않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던 때였다.

 

하지만 섀클턴의 일화를 읽고 나서는 마음을 다잡았다. 남극 횡단이라는 대단한 프로젝트도 기획서가 통과되어 후원받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목표를 하루아침에 이루려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눈물을 머금고, 컴퓨터를 켜고, 내 기획서를 더 갈고 닦았다.

 

그렇게 대장장이가 칼을 만들듯 두드리고 두드린 나의 기획서를 공개하려고 한다. 나만큼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은 크리에이터를 위해, 나만큼 나누고 싶은 가치와 메시지가 많은 크리에이터를 위해, 먼저 길을 걸은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한 크리에이터를 위해, 좋은 때를 기다리는 크리에이터를 위해, 실용적인 도움이 필요한 크리에이터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