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현장에 모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에 눈 뜨는 것도 이런 행사에서 얻을 수 있는 큰 소득 중 하나다. 언뜻 보면 다들 비슷비슷한 것 같아도 직접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가진 배경과 경험이 얼마나 다양한지,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그들의 여정을 엿볼 수 있는 행운은 마음을 여는 자의 몫이다.

 

SXSWedu는 낮 시간에도 살롱, 놀이터, 밋업(meetup), 멘토링 등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콘퍼런스 초심자라 그런지 정확히 내가 필요로 하거나 정말 관심이 가는 네트워킹 기회가 아니면 동시간대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세션들을 두고 찾아가 볼 마음의 여유가 들지 않았다.
 

대신 저녁에 열리는 네트워킹 이벤트에는 꼭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큐멘터리 상영회에 참석했던 마지막 밤을 빼면 세 번뿐이었지만, 개회 전날 일요일 밤의 얼리버드 소셜, 콘퍼런스 첫날밤의 오프닝 파티, 둘째 날 밤의 뉴욕 시 교육부 주최 네트워킹 파티, 이렇게 세 번의 네트워킹 이벤트에 참석했다. (다큐멘터리 상영회에 참석한 후 쓴 글)

 

휘발되어버리기 쉬운 대화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사진을 찍겠다'는 미니 프로젝트를 개인적으로 계획했다. 3초만 용기 내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에듀테크 기업 전문 채용 디렉터, 엘리자베스

도착한 일요일 밤의 얼리버드 소셜. 조금 일찍 도착해서 여독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몇 개 없는 소파 자리를 차지하고 아무 생각 없이 정지 화면으로 앉아있는데 웬 점잖고 원숙한 중년의 여성이 옆자리에 앉았다. 통성명을 하고 배경을 물으니 교육 분야 리크루팅 회사의 에듀테크 채용 디렉터라고 한다.

 

원래 심리치료사(psychotherapist)로 10년 동안 일했는데 인사 분야로 전업했다고 한다. 심리치료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상대했을 테니 상담을 통해 쌓인 노하우가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듀테크 영역에 발을 들인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어 보였지만 회사에서 준비 중인 행사에 초청할 업계 사람들을 만나러 왔다며 이 분야가 재미있다고 덧붙였다.

 

나이 차이는 꽤 있었지만 차분하고 지적인 눈으로 예의 바르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의 배경과 내가 SXSWedu까지 오게 된 여정을 듣자 공감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차분하고 관대한 중년의 여유는 언제나 참 멋있다.

 

나의 첫 공식 네트워킹 상대로 '와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고 사진을 찍어도 괜찮은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왠지 거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조금 놀란 듯했지만 기쁜 눈치였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 명함을 건넸고 나와의 대화가 즐겁고 유익했다는 뜻으로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토종 Texan 수업 디자이너, 앨런

엘리자베스가 떠나자 마치 다음 차례는 나라는 듯 노년의 남성이 자리에 앉았다. 풍성하게 기른 수염 때문인지 산신령 같은 범상찮은 기운을 느꼈지만 스탠딩 이벤트에 몇 분 더 소파 자리를 사수할 수 있어 일단은 기뻤다.

 

SXSWedu에 어떻게 오게 됐냐고 물으니 오스틴에 산다고 한다. '그래 보인다'고 답했더니 껄껄 웃는다. 콧수염과 턱수염, 검은 티셔츠, 오토바이, 픽업트럭, 문신과 해골. 반나절 동안 관찰한 '남남서(south by southwest)'의 텍사스의 이미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앨런의 직업은 수업 디자이너. 영어로는 instructional designer라고 하는데 내가 나중에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다. 교육 내용과 목표, 환경, 대상 등을 고려해 전략, 구성, 자료, 평가 방법 등을 설계하는 일이다. 분석하고 구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기술(educational technology)까지 포함하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이렇게 연세가 많은 분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니 신선했다.

 

내가 지향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그것도 연륜이 많은 분을 만나 자세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 달아오른 현장은 고속도로처럼 시끄럽고,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입모양도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어주는 할아버지에게 나도 열심히 웃음으로 답했다.

교육 사업 액셀러레이터의 코디네이터, 브리아나

오프닝 파티 장소에서 만난 친구. 교육 마켓플레이스 스타트업에서 잠시 몸담은 동안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지원한 적이 있던 터라 이 친구가 머리에 두르고 있는 헤드밴드를 알아봤다. 이제 두 달된 직장을 알아봐 주는 것이 반가웠던지 무척 기뻐하면서 신청 절차가 간소화된 새로운 지원 프로그램을 소개해줬다.

 

'Four point O'라고 읽는 4.0은 교육혁신을 이끄는 프로그램이나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액셀러레이터다. 어느 산업이나 그렇겠지만 교육 업계도 서로 다른 기능이 얼마나 다양한 각도와 다양한 층위에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지원'과 '연결'의 역할에 한계를 느껴 현장으로 내려와 보고 싶었는데, 앞으로 더 탐색하면서 꼭 맞는 틈새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남쪽에 내려온 김에 행사가 끝나고 여행 가려고 했으나 불발된 뉴올리언스에서 왔다고 했다. 나중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란다. 원래 집이 플로리다라길래 지난주에 마이애미 다녀왔다 하니 너무 좋아한다. 사진 찍어주니 또 너무너무 좋아하면서 꼭 연락하자고 누누이 말한다.

초등학교 교사, 로렌

브리아나와 헤어지고 몇몇과 미지근한 대화를 나눈 후 집으로 가려던 차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혼자 앉아있던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몇 블록 떨어진 초등학교의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무슨 과목을 가르치냐 물으니 여러 과목을 다 가르친다고 한다. 하루 종일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시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떠올랐다.

 

신상조사가 대충 끝나고 프로젝트 기반 학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프로젝트 기반 학습(project-based learning, PBL)이란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이 강조된 교육방식으로, EBS와 KDI가 공동연구하고 제작한 다큐멘터리도 있다.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 숙제로 프로젝트 비슷한 과제를 혼자 수행한 적은 있지만, 내가 받아보지 못한 교육이라 늘 궁금했다.

 

문: 프로젝트로 하면 재미있긴 할 것 같은데 매번 다른 프로젝트를 하면 전체 지식의 구조를 어떻게 잡아가니?

답: PBL로 짜임새 있게 가르치기란 무척 어렵지.

 

문: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교사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고 역할이 애매해서 심리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때?

답: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교사가 가만히 있는 건 아니야. 아이들이 목표에 잘 이를 수 있도록 질문을 준비하고 좀 더 깊은 사고를 북돋워주는 게 필요하지.

 

문: 그런데 그게 준비한다고 되는 일인가? 어떤 변수나 수요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힘들 것 같은데.
답: 당연히 준비할 수 있는 일이야. 프로젝트의 목적이나 목표는 교사가 설계하는 거니까. 그래도 아이들 하는 거 보면 늘 놀라. 아이들이 발견하고 생각해내는 것들이 내가 교사로서 준비하고 가르치는 걸 초월할 때가 있거든. 어릴 때는 다들 그렇게 기발했는데… 어른이 되면 왜 그런 게 사라지는지 역설적이지 않아? 나도 늘 아이들한테서 배워.

 

로렌과의 대화는 이틀간 만난 사람들 모두를 통틀어서 가장 유익하고 깊이가 있었다. 교육 현장에서 직접 '혁신' 교육법 중 하나로 꼽히는 PBL을 해봤고, 그래서 실질적인 내용의 대화가 가능했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어도 텍사스처럼 보수적인 곳에서는 이질감이 들 법도 한데 로렌은 나의 호의적인 이글아이가 좋았던지, 아니면 네트워킹 중에 만나기 힘든 대화다운 대화가 좋았던지 우리는 아마 40분 넘게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아,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미국도 교사는 박봉인지라 쌈짓돈도 벌 겸, 학교 봄방학 기간에 열리는 SXSW에서 배우나 뮤지션 등 행사장을 찾은 유명인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한 적 있다고 했다. 먹을 것을 사다 주는 일이 그중 하나였는데 아주 독특하면서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고. 예를 들면 아침에 먹을 시리얼 하나도 대중적이지 않은 어느 숨겨진 특정 브랜드의 꿀과 시나몬이 들어간 맛을 원해서 시내의 온 마트를 뒤지면서 찾아내야 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이디 가가는 아주 긴 빨대로만 마실 것을 마신다 했다.

환경교육 프로그램 운영자, 존 & 제니

SXSWedu에서 교류한 마지막 사람들. 세 번째 네트워킹 이벤트에서 만났는데, 세 번째였던 만큼 가장 많은 사람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만큼 누적된 피로도 상당해서 숙소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컸다. 이제 정말 가야겠다 마음먹고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마지막으로 들른 루프탑에서 존과 제니를 만났다.

 

그때 나는 이상한 사진작가에게 붙들려 오로지 호기심 하나를 동기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누가 우리 사진도 찍어달라며 카메라 앞으로 벌컥 뛰어들었다. 내가 행사의 공식 사진사 중 한 명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존은 과거 대안학교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오스틴에 있는 환경교육 운영 기구에서 일하고, 제니는 워싱턴 DC에 있는 그린빌딩협의회라는 곳에서 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환경과학'이라는 과목이 생겨 환경문제 교육도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이런 기구들이 협력해서 학교들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운영하는 듯했다.

 

원래 잘 알고 지내던 두 동료와 함께 신나는 대화가 시작됐다. 존은 대안학교(charter school)에서 부교장까지 했지만 (대안학교의 school leader들은 보통 30대다) 공교육의 뿌리를 뒤흔드는 대안학교의 태생적 문제를 깨닫고 지금은 심한 대안학교 안티가 되었다 했다. 내가 8월부터 일하게 될 곳 역시 대안학교라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존은 대안학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대안학교가 공교육이 개선될 희망의 싹을 잘라버리고 있고,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교육위원회(school board)가 없기 때문에 대표가 독단적으로 운영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대안학교의 특성상 광범위한 자율권이 허용되는데, 감독하고 견제할 세력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을 실험 대상 삼아 검증되지 않은 교육법을 마구 시행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선출을 통해 구성된 교육위원회가 배경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감놔라 배놔라' 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실효가 과연 있을까 의심은 됐지만, 대안학교 반대 세력의 논점이 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밤 11시가 넘자 존은 먼저 떠났다. 나도 가고 싶은 유혹이 다시 한번 스쳤지만 어느새 제니와 차분하고도 뜨거운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기운이 감도는 제니는 성숙한 사람이었다. 건축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린빌딩 관련 일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쭉 들려준 뒤로 무수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칸소 출신이라는 말에 클린턴 부부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히 힐러리와 대선으로 이어졌고, 캔자스시티, 멤피스, 내쉬빌, 뉴올리언스 등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들을 순회하는 내 여행 아이디어를 검증하기도 했다. 일과 인생, 도시의 외로움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점점 싸늘해지는 밤공기도 견뎌가며 두 시간은 족히 보냈나 보다. 진심 어린 허그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기다린 듯 쏟아지는 비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 뉴욕에 돌아와서 보낸 메일에도 최근에 나눈 대화 중에 가장 interesting 하고 engaging 했다며 반갑게 답해주었다. DC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보는 용기를 내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모두에게 행운을

네트워킹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후회는 없었다. 지식과 정보도 좋지만 각자 다른 배경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모여들게 됐는지를 보며 교육을 업으로 삼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글로만 배운 이론과 이상을 넘어 현실적인 문제까지 엿볼 수 있었던 것도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문제의 본질을 빨리 깊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교육의 미래, 미래의 교육 - 2016 SXSW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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