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위기에 대응하는 지혜를 찾아서

Editor's Comment

IMF 외환위기 사태가 일어난 지 올해로 20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한국 경제와 사회는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묻혀 과거의 뼈아픈 경험은 무뎌지는 한편, 일각에서는 제2의 외환위기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PUBLY에서는 외환위기 20주년이라는 역사적 맥락 아래, 과거를 통해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를 최전선에서 수습했던 이헌재 전 장관의 회고록 「위기를 쏘다」(중앙북스, 2012) 중에서 PUBLY 박소령 대표가 현재에도 유효한 통찰과 배움의 정수를 발췌해 재구성한 내용은
'외환위기 20주년, 과거에서 미래를 배우다' 리포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해당 리포트는 원본 도서에 수록된 글의 순서를 재구성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전문이 실린 리포트는 
2017년 11월 9일(목) 오후 6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상단 이미지 ©Igor Ovsyannykov

'구조조정의 전도사' '용병 소방대장' '야생마(재벌) 조련사' ⋯⋯.

 

이헌재란 이름에 붙는 수식어다. 경제 관료로선 아주 많은 편이다. 혹자는 내가 그만큼 유명세를 많이 치렀다는 방증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이헌재란 이름엔 개혁 이미지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과연 그런가. 나 스스로는 "약간 개혁 성향이 있지만 전반적 보수"라고 생각한다. 시장주의자요, 성장을 중시하는 친기업 성향이다. 그러나 막상 내가 경제 사령탑을 맡은 건 DJ·노무현 정권 때다. 운명은 나를 성향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이끈 셈이다. 그만큼 갈등도 사연도 있었다.

 

(중략) 막 유럽 위기가 커져갈 때였다. 만사유전이라더니, 또 심상찮은 조짐이 느껴졌다. 공직을 떠난 지 꽤 됐지만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이대로는 안 된다. 누군가, 뭔가 말해야 할 때다. 아무도 하지 않더라도 나는 해야 한다." 그래서 중앙일보 이정재 경제부장을 만났다. 1998년 금융 감독위원회 시절부터니 그를 알고 지낸 지도 제법 됐다. 그때부터 회고록을 쓴다면 그와 같이 하겠다고 약속해온 터였다.

 

(중략) 이 부장은 시작에 앞서 몇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의 질문은 독자의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를 고스란히 여기에 옮겨 적음으로써 '왜 지금 이헌재의 반추(反芻)인가'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정재 (이하 생략): (회고록 집필) 왜 하시려는 겁니까. 혹 다음 정권에 한 자리 노리시기라도 하는 건가요.

 

이헌재 (이하 생략): 우선 개인적 정리가 필요할 때가 됐어요. 국가 경제로 봐도 타이밍이 맞는 것 같고. 이제는 위기가 일상화하는 '뉴노멀'*의 시대입니다. 경험이 있으면서도 공유하지 않아 (국가가) 실수를 되풀이해선 곤란하지요.

* 정부·가계·기업의 광범위한 부채 감축으로 나타나는 3저(저성장·저소득·저수익)현상이 일상화 되어 새로운 기준이 생겨난 상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특징으로 꼽힌다.

 

위기 관리 국가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매뉴얼이 있었다면 외환위기 때 그렇게 큰 혼란·희생·고통을 겪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안팎에 위기만 닥치면 허둥지둥, 갈팡질팡해요. 제대로 된 매뉴얼만 있다면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이지요.

'왜 다시 위기를 얘기하는가' 일부 / 「위기를 쏘다」 (중앙북스) 18페이지 ©손현

그러나 '인간은 과거에서 배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경향은 있지요. 외환위기를 6·25 동란 후 최대 위기라고 합니다. 개개인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 공동체가 먹고사는 문제였기 때문이지요. 공동체가 겪었던 경험은 뭐가 됐든 소중합니다. 기록에 남겨야 다음에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지 않습니다. 외환위기 전과 후, 이 나라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어떻게 달라졌나요.

 

승자생(勝者生) 사회가 생자승(生者勝) 사회가 됐어요. 살아남기만 하면 이겼다는 얘깁니다. 대외 노출이 많았던 부분이 많이 다쳤어요. 그게 제조업입니다. 공공부문, 금융처럼 눈에 보이는 어려움을 겪은 곳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은 제조업의 몰락*입니다. 자영업, 중견기업, 제조업 노동자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회적 갈등도 가장 크게 일으켰지요. 사회 전체가 정체 상태에 빠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누구한테 들려주고 싶은 겁니까.

 

경제 관료, 국정 운영 책임자는 물론 일반 국민 모두에게. 경제는 생물이자 역사입니다. 돌고 돌죠. 경제정책도 그래요. 다 생장의 과정을 겪지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책은 없어요. '과거에서 배워 미래를 살찌운다'가 정답입니다. 일흔 가까이 살면서 그걸 확실히 깨닫게 됐어요. 이런 걸 얘기하고, 알려주고 싶어요.

 

(회고록) 제대로만 되면 재미·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방식은 어떻게 합니까.

 

반추가 좋을 것 같아요. 일종의 되새김질이지요. 과거와 역사와 경험과 지혜의 되새김질. 대신 나만의 반추로 끝나선 곤란하겠지요. 가능하다면 당시 대한민국 전체의 반추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뢰의 위기에서 첫 삽을 뜨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의 첫 임무는 외환일보 작성이었다. 한국의 외환 금고는 물이 들어찬 소금 창고 같았다. 외환 사라지는 것이 꼭 소금 녹아내리듯 했다. 두 달 사이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신용등급이 10단계 추락한 나라였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나라. 외국인들은 앞다퉈 돈을 빼갔다.

* 관련기사: '손발 갖추는 비상경제대책위' (서울신문, 1998.1.4)

** 무디스, 피치와 함께 세계 3대 신용평가사로 인정 받는 미국의 금융 기업. 국가나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하고 발표한다.

응급 조치의 시작,
숫자를 확보하라

오늘은 또 얼마나 녹아내렸나. 외환보유액*을 확인하는 것은 응급 조치의 시작이었다. "외환보유액 숫자는 비대위가 가장 먼저 확인한다." 숫자를 확보해야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서 파견 온 오진규가 그 일을 맡았다. 외환집중제.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모든 외환은 한은 창구를 거친다. 오진규는 매일 자정 창구에서 따끈따끈한 숫자를 받아왔다. 런던 외환시장이 문을 닫는 시각이었다.

* 외환보유액이 많다는 것은 국가의 지급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낸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가진 외화는 4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정에 숫자를 받으면 일보는 새벽 서너 시에야 완성됐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날 들락거린 외환과 남은 외환보유액 정도였다. 보고서 양식은 김용환 위원장이 직접 손질했다. 보고서는 아주 간명해졌다. 나는 김 전 장관의 솜씨에 항상 감탄했다.

'매일 새벽 4시 30분, DJ 깨운 종이 한 장' 일부 / 「위기를 쏘다」 (중앙북스) 56페이지 ©손현

완성된 보고서는 김용환 위원장을 거쳐 대통령 당선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외환일보가 당선자의 경기도 일산 집에 팩스로 들어가는 시각이 보통 새벽 4시 30분쯤. 비서가 그 종이 한 장을 침실 문틈으로 밀어 넣으면 어김없이 침실에 불이 켜졌다고 했다. DJ가 새벽마다 일어나 숫자를 확인했다는 얘기다. 김용환 전 장관이 직접 전해준 일화다.

*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선자 김대중을 가리킨다. 본 리포트의 원문인「위기를 쏘다」에서는 대부분 DJ로 표기된다.

 

종이 한 장 내려앉는 소리에 잠을 깨는 대통령 당선자. 얼마나 처연한 얘긴가. 누구나 들으면 혀를 찼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밤새 애를 태우며 외환일보를 기다리는 대통령 당선자, 그가 맡게 될 풍전등화의 나라. 이 이야기가 관가에 퍼지며 비대위의 위상이 굳건해졌다. '대통령 당선자는 비대위의 보고서로 새벽을 시작한다'가 정설이 됐으니. 재정경제원과 정보 공유를 둘러싸고 벌이던 실랑이도 이즈음 마무리됐다.

20년 전의 교훈
항상 외환을 챙겨라

"왜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느냐. 왜 간도 쓸개도 다 내어주었느냐."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 일을 얘기할 땐 모두가 현명해진다. 이랬으면 혹은 저랬으면 좋았을 텐데, 쉽게 얘기할 수 있다.

 

DJ 정권은 IMF 협약*을 쉽게 깰 수 없었다. 그랬다면 국제 사회가 한국에 등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얘기하겠지만,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기업들은 무서운 줄 모르고 돈을 빌려 과잉 투자를 했다.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을 믿고 돈을 빌려줬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별안간 "한국은 못 믿을 나라"라는 인식이 퍼졌다. 썰물처럼 시장에서 돈이 빠져 나갔다. 그것이 위기의 본질이었다. DJ가 그렇게 '국제 신뢰의 회복'과 '외자 유치'에 매달렸던 이유다.

*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조건으로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지금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3,000억 달러*를 오간다. (중략) 적정한 외환보유액 수준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고 중간 사이즈인 나라는 항상 외환을 챙겨야 한다. 한때 완전히 구멍이 났던 외환 금고를 다시 쌓느라 국민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 고생을 잊지 않는 것,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이다.

* 현재(2017. 10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3,846.7억 달러

실용 인사 평가 속에 개혁의 칼을 쥐다

1998년 3월 7일.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이었던 이헌재의 이름이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에 올랐다. 금융감독위원회는 '독립적인 금융기관 감독'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출범한 국내 최초의 통합 금융 감독 기구였다. (중략) 나를 금감위원장에 임명한 게 무슨 뜻이겠는가. 비대위에서 입안했던 은행·기업 구조조정안을 직접 실행에 옮기라는 주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원성이 쏟아질 것이다. '피비린내가 나겠구나. 사방이 적이 될 텐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니면 내가 죽는다.'


이때 떠오른 두려움을 나는 금감위 직원들에게 거르지 않고 전달했다. 4월 1일 취임식에서다.

사방이 적입니다.

나는 비유를 즐긴다.

구조 개혁을 한다는 건 어항 속 금붕어가 되는 것입니다. 수족관이 아무리 커도 어항에 불과합니다. 돌이나 바위 속에 숨어 있으면 안 보일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밖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입니다.

사심 없이 움직여라. 훗날 꼬투리 잡힐 일은 절대 하지 마라. 직원들을 다그쳤다.

포대 능선을 걸어가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양쪽이 낭떠러지입니다. 어디로 떨어져도 죽습니다. 능선 위에선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됩니다. 피아(彼我)가 없습니다.

지금 하는 일은 반드시 조사를 받는다.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추호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직원들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당부하고 싶었다. "목숨이 걸렸다. 제발 실수하지 말아달라"고 말이다.

DJ 정권의
구조조정 기술자가 되다

DJ는 나를 동지가 아니라 기술자로 발탁했다. 하기야 DJ 정권에 지분 한 점 없었으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당시 언론은 나의 금융감독위원장 발탁을 '실용 인사'라고 평했다. 그래서였을까. DJ는 내게 늘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금감위원장과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일한 2년 반 동안, DJ를 독대한 것은 꼭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2000년 7월 초, "장관직을 그만두겠다"고 사의를 밝힌 뒤에야 겨우 성사됐다.

 

이처럼 끝까지 날 기술자로 대했던 DJ이지만 국정 운영엔 본받을 점이 많았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다. 그 살벌했던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DJ는 한 번도 개인적 청탁을 하거나 정책에 대해 간섭한 적이 없었다. 재벌 개혁과 기업 워크아웃, 빅딜, 은행 퇴출⋯⋯. 은행이 퇴출되고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기업은 쪼개지고 합쳐지고 팔렸다. 그에게 들어온 청탁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도 DJ는 한번도 "누구를 봐줘라. 어느 회사는 손봐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가 내게 물어본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원칙에 맞는 것이오?"
"절차는 공정했나요"

일절 간섭이 없던 대통령과 총리.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덕분에 정권 초기, 나는 온 신경을 정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청와대의 의중을 읽으려 고개를 기웃거릴 필요도, 지레짐작으로 누굴 봐주고 안 봐줄 필요도 없었다.

 

[외환위기 20주년, 과거에서 미래를 배우다]

 

20년 전, 외환위기의 한복판에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단장, 금융감독위원장, 그리고 재정경제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한 이헌재 전 장관의 회고록 「위기를 쏘다」를 새롭게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20년 후 미래를 상상하고 준비하기 위해 이헌재 전 장관, 제현주 공공그라운드 대표, 박지웅 패스트트랙아시아 대표와 함께 고민하고 대화한 기록을 콘텐츠로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