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re you, 하이디 K.?

첫 직장 영국에서 3.5년. 좀만 더 버티면 받는 영주권의 유혹을 물리치고 100세까지 먹고 살 궁리를 할 겸 30세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졸업하면 새 직장의 부름을 받아 영국 아닌 어디 다른 데로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해 많이 나는 완전 이그조틱(exotic)한 곳으로.  

취리히 구시가, 리맛(Limmat) 강 (Credit: 하이디 K.)

스위스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네버엔딩 구직 폭풍 속에, 공짜 런던-취리히 왕복 비행기와 호텔에 혹해서 바람 쐴 구실 삼아 간 인터뷰가 시작이었다. 바라는 게 없으니, 아는 건 아는 거요 모르는 건 모르는 거라는 인터뷰를 하고 나오다 보니 쓸데없이 기세 등등해져 "어, 이거 되면 어떡하지"라는 괜한 김칫국.

 

모두가 감탄하는 완벽한 친절함과 정확함. 어찌 보면 비싸게 받는 만큼 정확하게 주는 걸로 보일 정도로 빈틈없어 보이는 나라. 스위스 친구들은 하나같이 개그 코드가 안 맞았고, 스위스에 일하러 갔다 너무 외로워서 옆에 아무 나랑 결혼했다 인생 꼬였다고 술주정하는 친구도 있었으며, 스위스 사람 알랭 드 보통도 스위스가 갑갑하다 하지 않았던가. 우울증 예방 차원에서 여기는 살 곳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모든 게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꽉 막힌 버스 안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중, 한순간에 영국과 런던이 좋았던 많은 이유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스위스. 삶의 만족도가 1위라는데 한번 살아 볼까. 오호라 세금도 파격적으로 낮은데. 

내가 이 나라에 받을 연금이 있나, 연고가 있나, 로맨틱한 이유로 붙잡는 사람이 있나. 그러다 지레 영국에서 마음이 떠버렸는데, 며칠 뒤 오퍼를 받았기에 천만다행이다.   
 

스위스행 비자 림보에서 보낸 반년

스위스에 오는 건 만만치 않았다. 너무 순조롭다 했다. 회사는 서로 네고를 끝내고 나서야 내가 유러피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혹시 일부러 숨겼냐고 하기에는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에 꼭 들어맞는 정직한 내 이름과 Look & Feel은 어떻게 할 것이며, 행여나 편견 없는 누군가가 오해할까 CV에도 사우스 코리안이라고 명시. 인터뷰를 했던 사람(현 나의 보스)은 비자 문제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고, HR은 어련히 알아서 걸렀거니 한 게 구멍이었을 거라 추측. 이제 와서 엎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알아서 수습을 해주기로 했다. 
 

유럽 국가들이 쳐놓은 고용 우선순위 (자국민>유럽인>>>>>>>>>>비유럽인) 장벽을 넘기 위해 회사가 잠시 한 3개월만 기다리라 했던 비자 림보에서 반년을 넘게 보냈다. 한국의 여름 폭염 속에 그곳의 여름은 시원하겠지라는 상상을 하며 스위스는 점점 영화 '아일랜드'의 그곳처럼, 언제 갈지 기약 없는 환상의 데스티네이션이 되어갔다. 
 

노트북을 열면 출근이요, 닫으면 퇴근인 자택 근무자로 한국 부모님 집에 얹혀 지내면서 그간 나가 산다고 끊어진 인연들을 적당히 복구하고, 오랜만에 친구, 가족, 친지 부대끼며 고액 집세 안내면서 때 되면 나오는 삼시 세끼 먹다 보니, 스위스고 뭐고 여기가 파라다이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한 달 뒤에 스위스로 출근하라는 지령과 함께 비자가 갑작스레 떨어졌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일사천리. 아직도 안 갔냐고 할 것 같아간다고 인사도 대강하고 왔다. 공교롭게도 만 32세 생일날 하루 종일 온갖 정착 잡무를 처리하게 돼서, 가는 공관마다 생일 축하를 받으면서 취리히 주민이 되었다. 

출퇴근에 필요한 420만 원짜리 연간 스위스 전역 교통 패스도 일시불로 질러 버렸으니 1년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Most Liveable City, 취리히

스위스 전체 인구 800만, 취리히 인구 40만. 서울 천만, 부산 350만, 제주도가 60만이다. 속닥속닥 웬만하면 잘 살만하네 싶다. 

 

프랑스 파리 사무실에서 내는 숫자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은 보면 열만 받는 OECD의 Better Life Index를 보자. 

출처: http://www.oecdbetterlifeindex.org

얘네도 빠지는 게 하나 있다. 옥에 티인 Civic Engagement and Governance는 투표율이 낮기 때문이다. 나머지가 평균 이상이니 투표해서 별로 바꾸고 싶은 게 없는 건지, 투표 불참 벌금이 7,000원(6 Sfr)이라니 모든 게 비싼 나라에서 싼 맛에 안 하고 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알고 보니 선거가 너무 많단다.)

Too good to be true?

하도 좋다 좋다 하니 아, 그래 알았다 싶다. 근데 내가 랭킹의 진짜 의미를 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법인세를 적게 내볼까 해서 스위스에 자리 잡은, 그러나 스위스 직원은 희소한 다국적 회사에서 일하고, 공용어가 4개(독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나 되는 나라에서 그중 하나도 할 줄 모르는 탓에 (고등학교 때 배운 독어를 너무 믿었나 보다), 중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언정, 인터내셔널 뉴스 앱에 뜰만한 사건 같은 건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는 나라에서 뭔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살게 될게 훤하다. 여기서 내 삶이 이 나라의 랭킹에 걸맞지 않더라도 그건 아마 내 사정. 

살다 보니 'Too good to be true'는 True가 아니거나, 모르는 대단한 무언가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스위스가 어느 쪽인지는 살아보면서 차차 탐구해 보기로. 

이제는 옮겨 다니는 것도 진이 빠져서 더 이상 못하겠는데 웬만하면 좋았으면 한다.  


유명한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제목은 일본에서 원작 동화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붙여진 것 같고, 1881년 발간된 조안 스퓌리(Johanna Spyri)가 쓴 원작은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Heidi's years of learning and travel' 과 'Heidi makes use of what she has learned'. 이런 교육적인 작가의 뜻이 있는지 나만 모르고 본 거 아니겠지…? (출처 : heavybookreview.wordpress.com)

 

'삶의 만족도 1위 스위스에서 배우는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 같이 완전 고루한 내용은 아무도 읽고 싶지 않을 테고, 외국인 노동자의 한풀이는 더더욱 읽고 싶지 않을 테니, 그 사이의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 결국 "사람 사는 거 다-똑같습니다"라고 미리 밑밥을 깔고 시작할까 한다. 그래도 격주 연재라니 2주에 한 건은 하는 삶을 지향하며 '스위스 스타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