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신들과 뛰고 있는 나

2015년 7월의 어느 날,
이텐 마을*의 옥수수밭 사이 흙길 위

* 수백 명의 케냐 마라톤 선수들이 살고 훈련하는 마을로 저자가 4주 동안 현지 마라토너와 살다 온 곳

Editor's Comment

"달리기로 세계를 제패하는 케냐 선수들은 어떤 훈련을 할까?" 달리기에 푹 빠진 아마추어 마라토너는 30년이 넘도록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길러내는 케냐 마라톤의 비밀이 궁금했습니다. 관련 책을 다 읽어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 직접 케냐로 날아갔습니다. 프롤로그 글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전문이 실린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리포트는 9월 5일 오후 6시까지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더 이상은 못 뛰겠다…'

 

어제와 같이 40분 정도 가볍게 뛰는 것인 줄 알았는데, 뛴 지 1시간이 넘고 있다. 전날 저녁을 너무 가볍게 먹어서 그런가? 금방이라도 빨간 흙길 위에 주저앉을 것 같다. 힘을 내려해봐도 더 지치기만 하고, 몸은 갈수록 무겁게 느껴진다. 목이 마르고 숨까지 벅차다.

 

이런 나와는 상반되게, 한 달 후에 있을 2015년 베이징 세계 육상 대회에서 케냐의 마라톤 대표로 뛸 준비를 하는 에드나 킵라갓(Edna Kiplagat), 헬라 킵롭(Helah Kiprop), 자넷 로노(Janet Rono)* 선수들은 내 옆에서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달리고 있다.* 헬라는 2015년 베이징 세계 육상 대회 마라톤에서 결국 은메달을 받았고, 2016년 도쿄 마라톤에서는 코스 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했다. 에드나는 37세의 나이로 201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헬라와 에드나는 2017년 8월 6일에 있을 런던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마라톤 종목에 케냐 대표로 참가할 예정이다. 그리고 자넷은 28세의 나이로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되는 선수이다. 자넷은 2015년 네덜란드 동북부에 위치한 즈볼레 하프 마라톤(Zwolle Half Marathon)에서 1시간 11분 10초의 개인 신기록을 달성하며 우승했다.

여러분, 먼저들 가세요. 킬루(Keellu)*에서 만나요.
* 2017년 7월 기준, 세계 마라톤 기록 2위 윌슨 킵상(Wilson Kipsang)이 운영하는 호텔이며, 당시 마라톤 대표들이 묵던 곳

포기하겠다는 것을 선포하고, 천천히 뒤로 처진다. 그런데 이들은 나를 두고 가지 않을 모양인지 같이 속도를 줄이면서, 갑작스레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성우, 우린 같이 가는 거야. 할 수 있어. 힘을 내!

헬라는 포기하려는 나를 쳐다보며 손짓한다. 같이 가자고. 할 수 있다고. 나는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이미 믿어버린 반면 그녀의 눈빛에는 내가 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담겨 있다. 부끄럽다. 달리자고 케냐까지 왔는데.

 

마라톤 신들의 응원을 받아, 다시 마음을 다진다. 일단 숨을 리듬 있게, 깊이 고른다. 코를 통해 공기를 들이마셔 폐와 배에 채우고, 잠시 멈춘 뒤 입을 통해 몸 안의 이산화탄소를 모두 내뿜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흡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기운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다음은 자세. 턱을 가볍게 당겨 허리와 목을 똑바로 세우고, 폐가 더 많은 산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슴을 편안히 편다. 아랫배 근육에 힘을 주면서, 등 아래가 작은 포물선을 그리게 한다. 팔은 약간의 힘만 주고, 거의 저절로 흔들리듯 움직인다.

 

보폭은 일부러 길게 하지도 짧게 하지도 않고, 가장 자연스럽고 가볍게 한다. 내 발이 중력에 맞춰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땅에 닿는 순간 발 뒤꿈치가 엉덩이에 살짝 닿을 정도로 당긴다. 이렇게 내 몸 이곳저곳을 점검하다 보니, 몸이 가벼워진다. 곧 뱃근육을 중심으로, 온몸이 하나가 되어 뛰기 시작한다.

 

포기하려 할 때보다 빨리 이동하는데도, 힘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달리는 순간에만 집중하고 있다.

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가 스스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오직 달릴 때 느낄 수 있는 무아지경. 제법 빠르게 공간을 이동하면서도 평안하다. 매 순간순간이 살아 있음으로 충만하다.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조금 전만 해도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럽게 달리던 내 입가에는 어느새 작은 미소가 걸린다.

 

아침 조깅의 끝 지점을 800m 정도 남겨두고, 마라톤의 신들은 속력을 올린다. 나도 무리하지 않으면서 속력을 최대한 올려본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은 내가 자랑스럽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그들은 하얀 이가 조금 보이는 미소를 보낸다.

 

같이 달리는 동안 우리는 나이, 국적, 마라톤 경험, 피부색, 성별 등 사람을 구분하는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달리기가 선물하는 '이 순간의 충만함'을 공유하고 있다. 나 역시 몸의 기쁨이 가득 찬 채로, 잇몸이 드러나 보이는 큰 웃음으로 화답한다.

여름에 케냐는 왜 가는거야?

2015년 5월의 어느 날,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

 

사랑하는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다. 학자금을 받아가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아들놈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유일한 여름방학 동안 좋은 회사에서 인턴을 하기는커녕, 달리기 하러 케냐 이텐에 간다고 하니 답답해하실 만도 했다.

 

물론 이텐으로 향하기 전 나이로비(케냐의 수도)에서 4주 동안 태양광 에너지 회사에서 인턴을 하기로 했다. 부모님은 그 회사에서의 경험이 진로에 도움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달리기는 어디서도 할 수 있으니, 학교 주변의 좋은 회사에서 인턴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도 조언했다. 주변 친구들도 내가 '아프리카'에 가는 걸 부러워하면서도, 결국 하는 말은 비슷했다.

달리기는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잘 생각해봐.

하루라도 빨리 이텐에 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석사 과정에서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가 앞으로의 커리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경험과 인연을 쌓으며 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스물여섯의 내가 갑자기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되어서 앞으로 달리기로 먹고살 길을 만들어 나갈 확률은, 일런 머스크와 친구가 되어 그의 집 뒷마당에서 인류의 화성 이주에 대해 조언을 해주며 사과를 먹다가 번개에 맞을 확률과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세계 최고의 달리기가 어느 수준인지, 직접 보고 같이 뛰면서 내가 세계적 마라톤 선수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엘리트 레벨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1년이 넘도록 매주 100km 이상을 뛰며 기본 체력을 준비했다. 뛸 때마다 삶의 충만함을 경험했고, 달리기를 지구에서 가장 잘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깊이를 같이 경험하고 '빠름'의 비밀을 훔쳐오고 싶었다.

 

이 열망은 내가 찾을 수 있던 케냐 마라톤에 관한 모든 책, 기사, 동영상을 읽고 보는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결국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나의 몸은 머리와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케냐에 가기 전 이텐 마을을 구글맵으로 찾은 뒤 바탕화면에 저장해 놓곤 했다. ©Google

내 심장은 쿵쿵 뛰면서, 직접 가서 보고 달리고 도전해야 한다고 나를 흔들었다. 심장은 이런 식으로 전에도 두 번 말을 걸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두 번 다 들어주지 못했다.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심장이 다시는 나에게 이야기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지금껏 이어온 선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점을 찍어보기로 했다. 이 점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과 어떻게 연결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았다. 달리기에 대한 나의 열망을 그 자체로 살아낸다면, 온전히 내 삶의 일부분이 될 것이라 믿었다.

결국 빠름의 비밀을 찾지 못했다

2017년 7월의 어느 날,
새벽 1시 54분의 송파구 방이동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아니다. 주중에는 강원도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퇴근 후 바닷길을 달리거나 수영을 하고, 또 그림을 그린다. 주말에는 서울 부모님 댁으로 올라와 지인들,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석촌호수에서 명상과 달리기 모임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사회인이다. 케냐에 다녀왔다고 해서 더욱 빨라진 것도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빠름'의 비밀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 못지않게 중요한
'느림'을 배웠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지 못하였다고 해서 케냐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오래 다녀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곳에서는 만들 수 없는 많은 추억을 만들었고, 지금도 내 삶의 일부분이 된 값진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벌써 2년이 되어 가는데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해발 2,400미터, 흙으로 된 육상 트랙 위에서 1km를 3분 이내로 10바퀴 이상 뛰던 케냐 마라토너들의 강인함이 지금도 느껴진다. 이들과 같이 하루에 최소 2바퀴, 많게는 3바퀴를 뛰었다. 그리고 낮잠을 자거나 풀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쉬는 동안 마라토너로서의 몸과 마음을 가꾸며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몸소 배우곤 했다.

이텐 마을에 있는 카마리니(Kamariny) 트랙 위에서 훈련하는 케냐 선수들 ©Tristan

그날 밭에서 막 따온 신선한 채소들, 양파, 토마토를 곁들인 스쿠마 위키(sukuma wiki), 햇볕에 말린 옥수수를 갈아 물에 섞어 끓인 후 손으로 떼어먹는 우갈리(ugali), 그리고 현지에서 하나에 100원이 채 안되던 아보카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침샘이 돈다.

 

수도꼭지나 샤워기가 없어 아침에 물을 큰 바구니에 떠다 놓았다가, 저녁에 "으아 추워!" 하면서 샤워를 하곤 했다. 화장실 앞 풀밭에서 바람과 수건에 몸을 말릴 때 느껴지던 고지대의 시원한 공기와 밤하늘의 달과 별이 요즘도 가끔 그립다.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경험한 소중한 기억이다.

 

마라톤을 2시간 10분대에 완주하는 선수들은 훈련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 걸음걸이보다 느린 속도로 매우 신중하게 '뛴다'. 그들은 그렇게 사뿐사뿐하게 발돋움을 하며, 그 순간 자신의 몸이 지면과 어떻게 반응하는지에만 집중한다. 그러면서 몸의 세세한 근육과 관절의 작동을 느낀다.

 

그들은 현재 몸 상태를 확실히 알 때까지 그렇게 천천히, 사뿐히 뛴다. 케냐 마라토너들이 전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빠른 이유는, 그렇게 천천히 뛰면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몸에 맞는 속도로 여유롭게 달리는 것은, 무리하거나 서두르면서 남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아름답다. 빠름은 다른 사람이 정한 '기준'에 의해서만 상대적으로 가치가 드러나는 반면, 여유롭고 편안하게 달리는 것은 지금, 여기, 이곳의 나로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뛰다 보면 잊고 있던 자신을 만나곤 했다. 모든 에너지를 다 썼다고 생각할 때 새로운 힘의 원천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달리기는 삶의 기준을 다시 나에게 오게 해주었다.

 

또한 달리기는 사회의 잣대, 규정, 기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달릴 때는 서로 평등하며, 깊이 소속되어 있다고 느꼈다. 함께 땀을 흘리며 서로가 살아있음의 경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요즘 내가 속한 Y세대*에 부는 달리기 열풍의 이유가 아닐까?
* Generation Y. 1981년에서 1994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로 2010년대 현재 청년층에 해당한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라고도 부른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독자 여러분이다. 케냐의 마라토너들이나 코치들, 혹은 내가 아니다.

 

이미 달리기를 하고 있는 분에게는 더욱 건강하고, 재미있고, 충만한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영감을 주면 좋겠다. 달리기를 막 시작하려는 분에게는 달리기가 주는 '살아있음'의 경이로움과 신비를 더욱 자주 느낄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달리기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 중 딱 10명이라도 '와, 나도 한번 내 몸을 저렇게 움직여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 오래된 운동화의 끈을 묶고 천천히 문밖으로 나간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 같다.

 

26번 떡국을 먹고 나서야 '꿈을 꾸지만 말고 한번 살아보자'고 결정한 청년이 왜 케냐까지 가게 되었는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마라톤계에서 신경 쓰지 않던 케냐 이텐의 작은 마을이 어떻게 세계 마라톤의 성지가 되었는지, 그곳의 마라톤 선수는 어떻게 훈련하여 세계적인 '빠름'과 '느림'을 연습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기대하셔도 좋겠다.

 

특히 달리기에서 재미를 느끼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달리기는 타고나야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김성우 저자가 케냐 선수들과 같이 생활하고 함께 달리면서, 몸에 익히고 마음에 담은 비법을 'Runner’s High'에 매혹된 분들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