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닿는 매개가 되다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온다고 했습니다. 1997년 어느 가을 저녁의 어느 신문 광고, 그 해 학교 근처의 어느 극장, 그리고 지하철 가판대의 어느 영화 잡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흐름이 어느 날 제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흐름에 이끌려 신문 광고에 난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 <중앙역>을 보았습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는 대학로 동숭시네마테크를 찾았고, 영화 주간지 씨네21을 허리에 끼고 통학을 했습니다.

 

이 흐름이 필연이었음을 깨달은 건 제가 씨네21에 입사한 뒤였습니다. 저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 대해 쓴 글 덕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잡지는 제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작게는 영화 정보에서부터 많게는 문화와 사회 전반의 이야기들, 그리고 보다 가시적으로는 제 삶의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씨네21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 번도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영화를 좋아해서, 그에 대해 생각했고, 이를 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자가 되었고 잡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잡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영화 잡지의 기자란 영화를 보고 글만 쓰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못지않게 사람도 많이 만나야 했고, 영화 외에 세상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어야 했습니다. 저는 스크린쿼터 1인 시위를 하는 박찬옥 감독을 인터뷰*했으며, 선배 그리고 동기들과 함께 촛불 집회에도 나갔습니다. 잡지가 사회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관련 기사: '박해일, 박찬옥 감독 1인 시위' (씨네21, 2006.2.14)

 

씨네21은 영화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입니다. 서울 패션 위크, 구르메, 온라인 자막 번역자의 세상같이 영화 바깥의 이야기도 실리곤 합니다. 그래서 인풋보다 아웃풋이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과 닿는 매개가 되다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온다고 했습니다. 1997년 어느 가을 저녁의 어느 신문 광고, 그 해 학교 근처의 어느 극장, 그리고 지하철 가판대의 어느 영화 잡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흐름이 어느 날 제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흐름에 이끌려 신문 광고에 난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 <중앙역>을 보았습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는 대학로 동숭시네마테크를 찾았고, 영화 주간지 씨네21을 허리에 끼고 통학을 했습니다.

 

이 흐름이 필연이었음을 깨달은 건 제가 씨네21에 입사한 뒤였습니다. 저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 대해 쓴 글 덕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잡지는 제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작게는 영화 정보에서부터 많게는 문화와 사회 전반의 이야기들, 그리고 보다 가시적으로는 제 삶의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씨네21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 번도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영화를 좋아해서, 그에 대해 생각했고, 이를 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자가 되었고 잡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잡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영화 잡지의 기자란 영화를 보고 글만 쓰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못지않게 사람도 많이 만나야 했고, 영화 외에 세상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어야 했습니다. 저는 스크린쿼터 1인 시위를 하는 박찬옥 감독을 인터뷰*했으며, 선배 그리고 동기들과 함께 촛불 집회에도 나갔습니다. 잡지가 사회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관련 기사: '박해일, 박찬옥 감독 1인 시위' (씨네21, 2006.2.14)

 

씨네21은 영화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입니다. 서울 패션 위크, 구르메, 온라인 자막 번역자의 세상같이 영화 바깥의 이야기도 실리곤 합니다. 그래서 인풋보다 아웃풋이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모든 게 새롭고 즐겁고 흥미로웠지만 점점 아는 것보다 많은 것을 토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아직 하루를 끝내고 싶지 않은 나날이 이어졌고, 그 마음을 그대로 안고 퇴근 후 홍대 근처의 커피숍을 배회했습니다.

 

지금이 아닌 다른 때, 이것이 아닌 저것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또 한 번 필연의 옷을 입은 우연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때 일본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2010년, 당시 도쿄에서 살던 집 앞(왼쪽), 도쿄 남서쪽에 위치한 이즈 여행 때(오른쪽) ©김도훈

워킹홀리데이 나이 제한의 마지노선인 스물아홉 살에 도쿄로 건너갔습니다. 모 장학재단의 일본어 스피치 콘테스트 입상으로 도쿄를 첫 방문한 이후, 출장 차 몇 차례 도쿄를 다녀오면서 점점 커져간 일본에 대한 사랑에 응답한 것입니다.

 

허나 외국인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행자의 일본과 생활자의 일본은 달랐습니다. 햄버거 체인 프레쉬니스 버거에서 일하며 버는 돈은 생활하기에 빠듯했고, 일본의 기본 생활 비용은 한국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잡지 하나 살 여유가 당시 제겐 없었습니다.

 

기치조지 인근에 작은 방을 얻어 살면서 씨네21과 10아시아의 도쿄 통신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영사의 제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살아있는 전기 작업도 했습니다. 잠시도 펜을 놓고 싶지 않았기에 저에겐 다행인 제안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잡지가 쉬지 않듯 저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려고 노력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는 일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저는 다시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여행 전문지 AB-ROAD, 남성 패션지 GEEK, 여성 패션지 VOGUE 그리고 씨네21까지 포함해 모두 네 개의 잡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천여 개의 기사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기획을 했을 것입니다. 잡지는 곧 기획입니다. 하나의 생각을, 하나의 이야기를 어떠한 형태와 방식으로 전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저는 이 놀이를 즐겼습니다.

 

특히 AB-ROAD에서 일할 때는 해당 도시에 맞는 기획을 구상해 기사를 썼습니다. VOGUE 출신 편집장은 제게 최종 OK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주었습니다. 저는 제 지식과 아이디어를 모두 동원해 새롭고 색다른 기사를 완성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투옥됐던 감옥을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어 보였던 중국의 여순에서는 그곳의 러시아 거리와 일본 거리를 조망했습니다. 도쿄와 가깝다는 이유로 관광지에서 소외되는 요코하마를 다루면서는 도쿄의 샛길로서의 매력을 탐구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와 정반대에 위치해 물이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방향이 정반대라는 뉴질랜드를 찾았을 땐 'NEW WORLD NEW ZEALAND'란 제목의 특집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우리와 정반대에 위치한 만큼 여러 가지가 우리와는 반대일 거라는, 그러니까 새로운 세상일 거라는 생각에서 떠올린 제목이었습니다.

GEEK 피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생선 촬영 ©정재혁

패션지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습니다. GEEK에서는 스피카, 크레용팝 등 걸그룹과 함께 러닝 화보를 찍었고, 포틀랜드의 킨포크 라이프를 취재하며 등산을 즐기는 남성을 섭외해 촬영했습니다. 더불어 피쳐 기사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생선을 두고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VOGUE에서는 건축가 11인에게 개와 고양이 집을 의뢰하는 기획을 완성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잡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아마도 제 인생의 만남 중 절반 이상은 잡지를 통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배우 틸다 스윈튼,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김선욱, 코미디언 김영철, 소설가 정유정과 백영옥, 일본 배우 에이타와 나가사와 마사미, 그리고 오다기리 조와 카세 료 등.

일본 배우 나가사와 마사미 인터뷰 ©정재혁

모두가 타인의 삶을 엿보고 이야기를 길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잡지는 제게 타인과 관계를 맺어주었고 인생에 동기를 부여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잡지를 사랑합니다.

 

잡지사에서 일하기 전에는, 기자란 글만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잡지를 만든다는 게 이렇게나 실외 활동인 줄은 몰랐습니다.

 

기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 기획 구상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실내 활동과 실외 활동이 함께 필요한 겁니다.

잡지는 삶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잡지를 통해 세상의 이야기를, 타인의 삶을 접하면서 우리는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잡지가 삶의 한 자락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그 한 자락은 더 큰 꿈을 품을 수 있게 합니다. 저에게 잡지가 그랬습니다.

 

잡지를 만나기 전의 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헤매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꿈은 자꾸 변하다 못해 실종됐었고,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잡지는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매일이 똑같은 것 같지만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BRUTUS(ブルータス, 브루타스)의 편집장 니시다 젠타는 요즘 잡지계의 흐름인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대해 '한 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의 대명사이던 적이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라이프스타일 잡지는 그럴싸합니다. KINFOLK가 그렇고 & Premium(일본의 매거진 하우스에서 발행되는 잡지)이 그렇습니다.

 

잡지도 자라납니다. 사람이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듯 잡지 역시 조금씩 성장합니다. 잡지가 삶인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잡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잡지로 인해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잡지 BRUTUS와 POPEYE(ポパイ, 뽀빠이)는 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조금 다른 차이에서 새로움을 바라보고, 그 새로움 안에서 이야기를 길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이번 리포트를 쓰면서 다시 한 번 잡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잡지는 세상을 만나고 세상과 이야기하는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순간 어떤 잡지와 만나게 된다면 그건 우연의 옷을 입고 온 필연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