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이 붕괴되는 시대

원고 작성을 마치고 불안감이 많았다.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바라본 도시에 대한 단상을 싣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자료를 읽을수록 바로 잡아야 할 지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5년간의 회사 경험으로 '기업의 일'과 '조선업의 공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당치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약점이 많은 리포트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도 변함없다. 완벽하지지 않기에 많은 이들의 의견을 보태서 시야를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발표 자료 및 오디오 듣기, 리포트 구매 고객 전용)

 

오프라인 살롱과 세미나를 통해서 도시재생 전문가, 산업의 미래에 관심이 많은 현업의 실무자, 지적 자극을 원하는 청년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났다. 리포트가 해답을 찾기에는 부족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겸허히 수용한다. 부족한 부분은 공부와 프로젝트를 통해 계속 채워나갈 계획이다. 다양한 고민의 공유도 있었다. 그 부분은 이 글을 통해서 나눠볼 만한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단순한 삶(simple life)’의 붕괴에 대한 우려였다

10대부터 20대에 공부가 끝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평생 뭔가를 학습하고 노동시장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세상에는 나처럼 배움 자체에 ‘중독'된 사람도 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도 많다.

 

최근 닥친 조선업의 위기와 영국에서 살펴본 북부 잉글랜드 제조업 도시의 붕괴는 그런 단순한 삶을 원하는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다는 징표에 가깝다. 공고를 졸업하거나 혹은 아무런 기술을 습득하지 않은 채 회사와 국가가 제공하는 직업훈련을 이수해서, 평생 정규직으로 살며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어쩌면 ‘보통 사람'이 승리감을 맛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산업의 위기와 자동화-로봇화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시대의 불안감을 독자와 공유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재교육'일까, 지금까지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일까?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은 감히 재교육과 보상(연금 또는 다양한 소득보전)을 견주면서 그들 삶의 다음을 결정하려 한다. 어쩌면 ‘보통 사람'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싶었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너는 로봇에게 밀려 낙오될 수밖에 없어."라는 말을 전해야만 하는 걸까? 다양한 기예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강박을 모두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는 걸까? 이 우울한 전망에 대해 어떻게 사회적 합의라는 것을 도출할 수 있을까?

 

축적된 실무 경험과 실패에 대한 기록

오프라인 살롱과 세미나에서 산업의 진화와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소중한 견해를 나눴다. 몇 년간 벌어졌던 조선업의 위기는 무리한 수주로 인한 공정 과부하가 초래한 부분이 있다. 해양플랜트 건조에 대한 조선업계의 실력은 과대평가됐고, 실적을 올려야만 하는 조선업계 경영진은 제살 깎아먹기식 수주를 진행했다.

 

원유 가격의 하락은 고객사에게 해양플랜트 사업에 대한 비관론을 주었고 모든 공정지연에 대한 책임을 조선업계에 돌리곤 했다. 계약취소와 인도지연이 반복됐다. 선박과 해양플랜트를 같은 야드(Yard)에서 짓는 상황에서 해양플랜트 공정지연과 비용상승은 선박 건조에도 과부하를 줬다. 결국 조선업계는 3~4년간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신규사업 진출에 공격적이었던 회사들은 ‘곳간'에 문제가 생겼고 공적자금을 받게 됐다.

 

문제의 정의는 쉽다. 허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기술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해양플랜트 건조에서 비롯된 손실은 모두 ‘학습비용'에 가깝다. 다시 유가가 상승해 해양플랜트를 수주할 상황이 오든, 해상플랜트 등 유사한 사업으로 진출하든 결국 실패의 경험과 교훈(lessons learned)을 바탕으로 해야한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다.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적하고
모든 기록을 남겨둬야 한다

그런데 현업의 가장 우수한 인력은 매번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면서 기록의 순간을 놓치곤 한다. 프로젝트 말미에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차분히 문제점을 분석하기보다는 기존에 오갔던 문서를 '건조백서' 등으로 남길 따름이다. ERP 등 기록을 남겨놓을 플랫폼은 만들어놨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모두 허사다.

 

이는 엔지니어에게 있어 ‘배움'의 차원에서도 치명적인 문제다. '축적된 실무의 기록' 없이 학교에서 배운 공학지식과 현업에서 느끼는 실무경험은 만나지 않는다.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비단 '산학협력 강화'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런 산업진화 관점에서 구조조정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을 축소하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 항상 인력을 감축하고 설비를 축소하며 '핵심'만 지켜낸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우선순위는 맞을까? 인력 감축은 '잉여 인력'이 아닌 '핵심 인력'의 유출을 가속화시킨다. 재무적 위기가 사라졌을 때 '일할 사람'이 없는 사태가 만성적으로 벌어진다. 그 사이 핵심 인력은 경쟁사나 타국으로 유유히 이직하고 기술을 유출한다.

 

비단 유형화한 자산만이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무형자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쇠락하는 산업에서 '고숙련 엔지니어'에게는 어떤 비전과 목표를 줄 수 있을까? '치킨집 사장' 밖에 될 수 없다는 공포를 완화할 방법은 없을까?

양적 팽창에서 질적 전환으로

영국의 도시를 보면서 생각했던 마지막 화두는 도시의 전환이다. 제조업 도시가 흔들릴 때 한국이 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비스 산업이나 관광 산업으로의 전환일까? 도시이론의 다수 설은 그래도 하던 제조업에 기반을 둔 산업을 영위하는 것이다. 기존의 노동자를 흡수하고, 조금 더 고도화하여 고학력 엔지니어를 묶어낼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 성공의 기초라고 한다.

 

부산, 울산, 경남 임해지역을 기반으로 둔 '동남권'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부터 지금까지 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를 부양하고 높은 수준의 소득을 창출해, 수도권 집중을 막아왔다. 그 기반은 제조업에 기초한 산업경제였다. 제조업 위기가 올 때마다 동남권을 관광 산업과 기타 서비스 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올바른 방식일까? 영국의 도시는 리포트를 통해서도 언급했지만,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음을 역설한다. 몇 명이나 먹여 살릴 수 있으며, 그 일자리는 어떤 것일까? 일자리의 질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한다.

 

나는 한국이 처음으로 산업화 경제의 근본적 위기의 초입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양적 팽창'에 이은 '질적 전환'으로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성공사례로 불리는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경험을 참조하려 한다.

 

물론 일방적인 답의 도출은 불가능하다. 인구 규모로 볼 때 스칸디나비아 3국을 합쳐야 2천만 명에 그친다. 한국처럼 5천만 명을 부양해야 하는 나라에 한 번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천만 명 근처의 인구에서 영국은 서비스 산업과 금융 산업의 방향을 잡고 갔다. 그 결과 한 편에는 IT, BT 그리고 금융업의 호황이 있었지만, 기존의 '굴뚝경제' 인원들은 쇠락한 도시와 함께 사회에서 소외됐다.

산업과 도시와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고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게 관건이다

여행을 마쳤고, 대화를 나눴다. 그럼에도 아직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처음 리포트를 쓸 때와 같은 마음이다. 실무를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느꼈다. 대화의 장을 계속 열어 둘 생각이다. 그 이전에 스스로 좀 더 갈고 닦을 것이 많다. 그 이야기를 PUBLY를 통해 다시 교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부록: 함께 읽으면 좋은 추천도서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축적의 시간」, 지식노마드 (2015):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산업진화' 관점에서 제조업 위기를 조명한 책이다. 출간한 지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문제의식은 더 크게 다가온다.
     
  • 조주은,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2004): 서울에 살면 산업도시의 삶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산업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살아갈까? 울산 현대자동차 현장 노동자의 아내인 조주은 박사가 쓴 문화기술지(ethnography)를 추천한다.
     
  • 권석하, 「영국인 재발견」, 안나푸르나 (2013): 영국 인류학자 케이트 폭스가 잉글랜드 사람들의 문화를 면밀히 따져본 문화기술지. 여행을 가거나 영국 사람과 대화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영어 공부보다 이 책이 필요하다.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 특파원 다니엘 튜더의 추천서이기도 하다.
     
  • 박배균 , 장세훈, 김동완,「산업경관의 탄생」, 알트 (2014) / 박배균, 김동완, 「국가와 지역」, 알트 (2013): 한국의 산업도시는 어떤 방식으로 출현했을까? 동남권 도시들과 다른 산업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따져볼 수 있는 도시사회학 이론서다. 「산업경관의 탄생」이 사례연구에 가깝다면, 「국가와 지역」은 이론서에 가깝다.

 

[사라진 영국의 산업도시]

아래의 링크에서 지금 바로 리포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